일본의 무도 재팬 채널에서 2018년 10월 11일에 업로드한 1인칭 오노하 일도류 영상인데 매우 볼만하네요.
왜 카타 이름이 그렇게 정해졌는지 직관적으로 나타납니다.
1본목 히또쯔가찌는 말 그대로 한번에 상대 칼을 죽이고 한번에 이기니까 히또쯔(한번)가찌(이김)이고
2본목 무까이즈끼는 말 그대로 맞서 향해(무까이) 찌르기(즈끼) 해서 중심을 점해 찌르니까 무까이즈끼
3본목 쓰바와리는 내가 강하게 중심만 잘 지키면 아무리 하단까지 강하게 내리베어도 쯔바에 막히며 밀려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칼막이(쓰바)가 갈라진다(와리)라는 기술명과는 어째 정반대...
5본목 와끼까마에노쓰케는 무까이즈끼와 같은 요령으로 맞질렀으나 상대가 강하게 버티며 대항할 때, 내가 옆으로 밀어 중심을 점하면 상대가 급해서 내 칼을 확 밀면 칼을 옆구리에 둔 자세(와끼까마에)로 밀려 붙였다(쓰케)가 상대의 빈 머리를 치는 것으로, 내가 중심을 점하면 상대가 칼을 강하게 치거나 밀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행위는 빈틈을 크게 만들어내니 즉시 베어버리라는 검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이런 내용은 대외적으로도 이미 수없이 시연으로 공개가 된 것이고 하비키(날을 세우지 않은 철검) 시연에서 진짜 숨겨진 검리가 드러납니다.
1본목 히또쓰가찌에서는 칼날을 아주 약간 비스듬히 틀어서 내 칼날로 상대 칼면을 타고 들어가 상대 칼을 밀어내며 베어버립니다. 이 요령이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유출되지 못하고 단순히 시노기로 밀어낸다 라고만 애매하게 알려져 있어서 옆면으로 밀거나, 튕겨내는 식으로 하는데 그럴 경우 힘이 부족해서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던지, 상대가 칼을 부딪치지 않고 피해버리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2본목 무까이즈끼에서는 칼을 틀어서 칼등으로 상대 칼을 빗겨내며 엇나가게 만들며 찌릅니다.
이 방식은 카게류 엔삐에서도 "イカニモツヨク切テ組テ後ヘ寸ルヘシ 강하게 베어서 얽히고는 (상대의) 뒤쪽으로 검을 붙여야 한다." 라는 방식이라, 일도류 또한 똑같이 넨류에서 파생된 (넨류-츄조류-토다류-카네마키류-일도류) 유파임을 생각해보면 넨류에서 유래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죠.
3본목 쓰바와리는 위험해서 그런가 목검 때처럼 쯔바를 깊게 때리진 않네요. 그리고 칼끝을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살짝 상대 칼날과 접촉시키면서 반사와 에너지 감소를 유도합니다.
이런 방법들은 양옆으로 두꺼운 목검과는 달리 8~4mm두께밖에 안되는 철검에서 확실하게 반사를 성공시키기 위한 비법으로 형초장검의 체(剃), 미야모토 무사시의 원명류에서 사용했다는 상대 칼을 옆으로 밀어내며 옆을 타고 들어가 손가락을 쳤다는 "네바리오 카케루", 야규 신카게류의 쿠네리타치, 무예도보통지 왜검의 우수우각 좌일타 등에서 나타나는 기법입니다. 칼날 면은 약하고 칼날과 등은 두껍고 탄성이 없어 강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면과 접촉시켜 상대 칼이 튕기거나 밀릴 수밖에 없는 비밀이죠.
역시 일도류도 목검으로는 보여주지 않지만 하비키로는 어쩔 수 없이 다 보여줄 수밖에 없고, 결국 진검으로 할 때에는 다 비슷한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이런 비법을 알고 모르고가 되고 안되고를 확실히 결정하고, 옆에서 보면 절대 모를 비법들이고, 옛날 같았으면 유출되었으면 몽둥이 들고 쫓아갔을 기법들입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네요.
덧글
쯔바와리鍔割는 상대가 내 쯔바鍔까지 가르는割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한걸음 뒤로 빼면서 상대의 검선 밑에서 떠오르면서 상대의 검을 감지 않으나 감는 느낌으로 중심을 점하는 법을 배운다고 하던데 하비키刃引으로 하면 ‘하리張’처럼 날각으로 튕기게 되네요.
진검의 테노우치로 운용하는 베기와 찌르기를 ‘시라이 토오루白井亨’가 ‘오로시卸’와 ‘스쿠이匙’로 부르면서 초학에서 배우는 베기와 찌르기와 구분을 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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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ike.baidu.com/item/%E9%A1%B9%E5%A7%93/10971507
http://baike.baidu.com/item/%E9%A1%B9%E5%AD%90%E5%9B%BD/4704557
《史记。项羽本纪》项氏世世为楚将,封于项,故姓项氏。”之前,项羽就姓项了。
사기 항우본기 항씨는 대대로 초나라 장수로 항땅에 봉해졌으며, 그렇기에 성이 항씨이다.
《左传》云灭项,
좌전: 멸항을 말한다.
《公羊传》曰为齐桓公所灭,子孙以国为氏,项橐八岁服孔子,燕下相人,为楚将,子梁,梁兄子籍,号‘西楚霸王’,项他、项伯、项襄并籍之族也
공양전 : 제환공은 멸로 하여금 자손들을 그 분봉된 나라의 땅이름을 성씨로 삼게했는데, 항탁은 8살에 공자를 섬겼고, 연 하상사람으로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고, 아들로 항량을 두었다, 항량의 형의 아들이 항적이고, 호를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고 하였다, 항타, 항백, 항량은 모두 항적(항우)의 씨족들이다.
《广韵》,其记载:“项,姓。本姬姓国。《公羊》曰‘为齐桓公所灭’,子孙因以为氏,项燕为楚将,生梁。梁兄子籍,号‘霸王’。
송나라 광운 항, 성씨이다. 본래 희씨의 국성이었다. 공양에 이르기를 제환공은 멸로 하여금 자손들을 그 분봉된 나라의 땅이름을 성씨로 삼게했는데, 항탁은 8살에 공자를 섬겼고, 연 하상사람으로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고, 아들로 항량을 두었다, 항량의 형의 아들이 항적이고, 호를 패왕이라고 하였다.
《郑通志·氏族略》:或言姬姓之国,故城在今陈州项城县东北一里。为齐所灭,子孙以国为氏。项橐八岁,孔子师之。
1161년 정초郑樵 정통지 씨족략 혹은 말하기를 희성姬姓의 나라로 옛성이 지금 진구 항성현 동북 1리에 있다. 제나라가 멸로 하여금 자손은 그 나라로써 성을 삼게했다. 항탁은 8살에 공자를 섬겼다.
남송南宋 왕응린王应麟撰 성씨급취편《姓氏急就篇》记载:项氏,姬姓国,为齐桓公所灭,子孙以以国为姓。项橐七岁为孔子师、楚有项燕,世为楚将,封于项,生梁,梁兄子籍、汉有项曼卿、吴项峻、唐有项斯、宋有项世安。
항씨는 희성姬姓의 나라로 옛성이 지금 진구 항성현 동북 1리에 있다. 제나라가 멸로 하여금 자손은 그 나라로써 성을 삼게했다. 항탁은 8살에 공자를 섬겼다. 초나라에는 항연이 있었고, 대를 이어 초나라 장수였고, 항땅에 봉해졌고, 항량을 낳았고, 항량의 형의 아들이 항적子籍이며, 한나라에는 항만경项曼卿이 있었고, 오나라에는 항준项峻이 있었고, 당나라에는 항사项斯가 있었고, 송나라에는 항세안项世安이 있었다.
바이두의 항씨족보 관련 글 보니까 항씨項氏는 원래 장량张梁처럼 주周나라의 국성國姓인 희씨姬氏였네요.
사기나 딴지일보 초항쟁패 등을 보면서 항씨 일족은 밑에서부터 자신의 무력, 무명으로 올라온 가문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설마 희씨姬氏일줄은 몰랐습니다.
보니까 먼저 주왕실에서 자손을 보내서 봉방건국封邦建國을 했는데 나중에 초나라에 멸망해서 흡수되었고, 이후에 항국項國의 국군國君은 땅이름을 성으로 해서 항씨가 되었습니다.
사기史記를 보면서 항우가 뭘 믿고 초의제를 저렇게 괄시하나 싶었는데 주周나라 희씨姬氏의 후예이자 대대로 장군을 역임해왔다면
함곡관 입관하고, 18제후 분봉하면서 봉건체제가 희씨姬氏의 후예인 항우가 다시 정립했다고 여기고서 초楚나라 미씨羋氏보다 항씨項氏의 격이 높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네요.
항씨들이 분봉받은 항項 땅은 지금도 허난성河南省 샹청시项城市로 내려오고, 여기나 옛초나라 지역에 항우 직계라고 하거나 그 외의 계보로도 항씨들이 옛 초나라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검술 정종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겠지만, 현대에 와서는 수평막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극소수 외에는 흔치 않으니까요.
철검이 얇고, 면과 날의 구분이 워낙 명확하니 저렇게 하지 않으면 반사시키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저렇게 틀어서 반사시키는 방식이 골라이어스 매뉴얼의 쉴하우 묘사에도 나타나고, 우리는 저걸 2016년부터 연습해왔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고 쉽게 적용할 수 있었죠. 그때만 해도 우리의 특색이라고 생각했는데, 동북아로 연구를 확장하니 그냥 전 세계 어디나 다 쓰는 기법이었죠;;
항우 같은 경우 단순히 힘을 믿고 군주를 무시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귀족이고 머리도 좋았음을 생각해보면 그런 가능성도 있겠네요. 혈통으로 봤을 때 이민족 초나라 국왕보다 계통상으로 우월한 주나라 분봉제후라고 한다면...
아마 18제후분봉과 초의제 살해 시점에서 항우는 본인이 미씨羋氏의 초나라보다 원래 희씨姬氏였던 항씨項氏가 주무왕周武王의 패업을 이뤘다고 생각하고,
싸우지 않고 그대로 진나라에 항복해서 힘을 온존했고, 본인들의 역량으로 독립한 제나라를 빠르게 박살내고,
삼진을 제패하고 중원에 기어나온 유방을 정리하면
나머지 떨거지들은 알아서 숙이거나, 쉽게 제패해서
주무왕周武王을 넘어서 본인이 대신하고자 했던 진시황秦始皇의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던데
팽월을 자기 사람 만들거나 아니면 아주 처분해서 후방정리하지 않은 것 빼고
18제후왕 분봉, 홍문연, 관중으로 근거지를 옮기지 않은 것(초인목후이관楚人沐猴而冠), 혈족 위주의 등용 등의 정책을 다시 보면 디테일에서는 잘못한 게 많지만 큰 방향성, 대전략에서 항우가 실책한 것은 의외로 별로 없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더군요.
팽월이 어그로관리하고, 유방이 형양-성고에서 탱킹하고, 한신이 레벨업해서(북벌) 누킹하고, 영포를 회유해서 항우를 포위한다는 유방의 대전략도
맹약을 깨고 휘하의 제후들의 군대를 해산한 항우를 뒷치기해서 겨우 이긴 거지
유방의 대전략이랑 항우의 대전략을 비교하더라도 딱히 아주 잘못된 것은 없었다고 봅니다.
팽월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거나 무력화시켜서 후방을 정리하고, 도성屠城을 적당히하고 백성들을 위무했더라면 한신의 북벌이 성공하기전에 제나라를 박살내고, 형양-성고에서 버티고 있던 유방이 원래 역사보다 먼저 무너지고, 한신도 정리하면 항우가 천하통일 했겠다 싶습니다.
항씨項氏가 희씨姬氏였다고 보니까 항씨 집안에 전래된 무술은 호분虎賁에서 유래한 주나라 제식이 현지화되어서 성립된 형초장검荊楚長劍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