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사이프의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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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검술의 한계 전술적 관점


사료로 남아있는 내용을 놓고 봤을 때 조선 관아의 검술 교습 체계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초기에는 기효신서의 번역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초기의 조선검술은 기효신서 따라하기에 지나지 않았고,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일본의 검술 카타들이 수록되면서 좀 나아지지만, 무예도보통지 시대가 되면 카타들이 사라지고 혼자서 하는 투로들만 남는다. 예도보(조선세법)은 아니지 않냐고 할 수 있는데, 원래 예도는 총도/총보만 있었고 예도보는 무비지에서 보고선 이게 원본인가보다 싶어 나중에 발췌 수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다른 검술들이 언해본과 뜻이 통하는 것과는 달리 예도보는 언해본과 뜻이 잘 안통한다.

다른 사료를 통해 또다른 기본기가 있었느냐를 유추해 보아도 단서가 따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본국검, 예도, 쌍수도 같은 투로를 무과 시험의 종목에서 선택해서 볼 수 있고 각 종목별 합격자 수도 나와 있는데 이런 투로들이 그 자체로 시험 과목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군영들마다 검술을 몇가지 선택해서 했는데 역시 이런 투로들이다.

그러니까 조선검술은 ~검이라고 해서 기본기-기술연습-대련까지 포함하는 완성된 검술이 여러가지가 준비된 게 아니라 그냥 XX검이라는 이름의 투로만 몇개 준비된 게 끝이었다는 이야기고, 검술은 점수따기용 교양과목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조선검술은 크게 나눠 쌍수도, 제독검 등의 기효신서 계열, 예도 등의 무비지 계열, 왜검과 교전 등의 일본 계열로 나뉘는데 기본 공격이나 자세 등을 일컫는 이름조차도 각 계열마다 따로 논다! 기본적인 용어와 검리의 통일조차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한 군대를 가르치기 위한 통합 커리큘럼으로써의 정리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본국검이라고 보는데 일격(一擊)/일자(一刺)등의 일본계열 용어, 은망/수두/우찬격 등의 무비지 계열 용어, 향전격적 향우방적 등의 기효신서 계열 용어가 섞여있다. 각 검리를 통합 정리하기 위해 하나의 통합 투로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지며, 타국의 것이 아니라 자국의 것이므로 본국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영청중순등록에서도 나오듯이 본국검, 신검의 합격자는 비율상 0.2%밖에 되지 않으므로 아예 인기가 없었으며 통합 투로로써의 위치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모아김씨의 도움으로 조선검술들의 원형을 역추적할 수 있음은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검술을 참고로 형성되었는지도 알 수 있는데 조선검술은 이미 무예도보통지의 시대에 간략화, 파편화되어있어 사실상 커리큘럼으로써의 가치는 상실된 상황이었다. 그 이전에도 커리큘럼으로써 가치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고종 시대에 좋다는 총 아무거나 사다 무장시킨 것처럼 좋다는 검술 아무거나 들여다가 난잡하게 모아놓은 느낌이고 그조차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전이 그나마 2인 기술연습, 구미다치 스타일인데, 교전에서도 그다지 기술적으로 수준 높은 것이 없다. 타돌해서 베기로 키리무스비(베기해서 칼이 충돌하는 것)를 각각 내려베기, 올려베기로 하는 것과 내려베기를 검을 수평으로 들어막고 치는 것을 서로 반복하는 것, 찌르기를 내리쳐서 튕겨내는 것, 막판의 소드레슬링이 전부다. 모아김씨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직심영류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기술 구성인데,

교전 카타는 칼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병사가 기세를 가지고 용감하게 공격하며 부딪치고 싸우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어 간단한 기술로 기세와 용기를 기르기에 좋긴 하지만 너무 단순한 기본기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그냥 병사용 이상의 뭔가를 기대할 수는 없는 수준이다. 이걸 만든 김체건의 사려 깊음은 알만하다. 검술 훈련비중이 적어 기술을 심도있게 배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초보자에게 가장 유용한 힘과 기세, 용기를 기르는 데 중심을 둔 시스템으로 그의 마음을 알 만 하지만, 아무래도 수준높은 검술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만족을 주기는 어렵다. 게다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예신보에서는 양날검으로 연습했는데 자꾸 다치니까 환도로 바꿨다가 다시 목검에 가죽 씌운 걸로 대체했다고 하는데 그정도의 구미다치도 소화를 못한 걸 보면 교관단의 노하우나 교육생들의 수준이 김체건이 원한 최소한의 정도도 만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

직심영류나 다른 일본 유파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왜검이나 교전, 명대의 무술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조선세법 등을 보면 검의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고 진짜를 잘 배워온 것으로 보여지지만 결국 검술은 교양과목 취급받고 적당히 투로로 정리해서 그것만 연습하는 과정에서 심하게 몰락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다못해 김체건의 교전이라도 열심히 했으면 당장 전쟁터에서 꿀린다는 소리 듣지 않았을 것 같지만 잘 이뤄졌던 것 같지도 않다.

여러군데에서 중구난방으로 들여온 검술의 혼재,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의 부재, 그로 인해 혼란스러운 여러 검술 체계의 난립, 적당히 안다치는 교양과목 수준으로 처리했던 검술에 대한 인식과 비중, 이를 인지하고 해결하려 한 교전이나 본국검 등의 시도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점차 외면받은 점 등은 사료를 통해 분명하게 인지되는 조선 관급 검술 체계의 참담한 한계점이다.

결국 구한말 조선은 일본의 죽도 격검을 도입한다.

덧글

  • 일화 2018/09/13 08:24 # 답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로군요. 본문에도 잠깐 언급되었다시피 구한말 신식병기/전술을 받아들일 때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 함부르거 2018/09/13 11:01 # 답글

    군사적으로 검술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던 거 같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그런 상태로 놔 두었을 리가 없지 않을까요.
  • 제트 리 2018/09/13 22:53 # 답글

    그래서 인지 사쓰마쪽 병사 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말았지요
  • ㅁㅁ 2018/09/14 08:28 # 삭제 답글

    흠 임진왜란때 왜병 한명이 왜검들고 난입하면 그대로 배 한척 탈취되고 그랬던게 다 이유가 있었던거군요
  • abu Saif al-Assad 2018/09/14 11:00 #

    게다가 임란 당시에는 관급 검술체계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니까요. 임란 중부터 일본이나 명나라 군관에게 알음알음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고,이후에야 기효신서 번역이 이뤄지죠.
  • 해색주 2018/09/14 22:57 # 답글

    고려말의 그 남로북왜를 거치면서 정말 다양한 전투를 했을텐데 조선은 왜 이렇게 검술이나 창술이 발달하지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궁시는 꽤 하는 것 같은데, 그 많은 전투를 다 궁시로 할 수도 없었을 테고 어찌 되었거나 백병전을 아예 피할 수는 없었을텐데 말이죠. 참 궁금합니다.
  • umberto 2019/02/14 03:05 #

    실록을 보면 조선초에 갑사들이 목검, 목극으로 대련을 한 기록도 있고, 삼갑창이라고 해서 대열을 이뤄서 집단으로 서로 공방을 하는 훈련법도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전기의 검술은 철저하게 방패+검술이라 순수한 검술만의 검술은 없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실록 기록을 보면 방패, 목검을 들고 갑사들이 대결을 하다 실수로 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검술훈련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부상, 사망 위험이 큽니다. 조선은 오랜기간 평화를 누렸기 때문에 굳이 위험성이 큰 검술훈련이 등한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서양, 중국, 일본처럼 치안이 불안해서 민간에서 검술을 수련해야 할 필요성도 없었으니 자연히 쇠퇴했겠죠. 그리고 검술은 과거시험에서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아주 곤란합니다. 궁술은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합니다. 그에 비해 검술은 객관적 평가도 어렵고 부상이나 사망 위험도 크죠. 이런 점도 검술 쇠퇴의 한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 오렌지 공작 2019/02/14 05:47 #

    이렇게 나라가 평안한데 위험한걸 왜 굳이 하나+시키지 않은거니 힘들고 귀찮은거 빼버리고 그시간을 정훈으로 하자~ 하는 자주보이는 당나라 군대화가 아닌지 싶습니다.
  • 불타는이글루 2018/09/16 21:24 # 삭제 답글

    조선시대에는 이상하리만치 유독 검술을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 abu Saif al-Assad 2018/09/16 21:36 #

    형식화되어서 그냥 투로 하나 하고 마는 것 같고 검술 싸움 자체가 별로 없을 거라고 가정한 것 같네요.
  • umberto 2019/02/14 09:13 #

    원래 고려, 조선의 전술 체계가 말타고 활쏘기를 통한 원거리 제압이 주요 전술이었습니다. 근거리 단병접전은 보조적 위치였고 위에 썼듯이 안정된 치안 상황에서 민간의 수요도 없고 군사적 용도에서도 평가하기 곤란하고 수련하기 위험하니까 쇠퇴했다고 봐야죠.
  • 오렌지 공작 2019/02/14 05:41 #

    북방경계도 활이나 대포, 소형총통만 쏴도 평정돼니 쓸 일이 진짜 없죠. 왜인들은 한동안 저들끼리 싸우느라 볼일 많이 없고 조선 내부도 팍스 조선이라 불러야 하는게 아닐정도로 태평하고 도적, 산적이야 전문적인 검술은 못배운 야인들이고 체계가 갖춰진 군대도 아니고 그마저도 보기 드물고 잡범이나 몽둥이로 두들겨 잡는 정도였겠죠... 뭐 속은 곪을대로 곪아가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명나라도 슬슬 망해가던 때죠.
  • ㅇㄱㅁ 2018/09/18 20:36 # 삭제 답글

    지금도 어떤 분은 검보만능을 외치고 계시더군요
  • 2019/02/12 15:12 # 삭제 답글

    무예24기 등을 위시한 단체에서 하고있는 조선검술 복원 노력은 그냥 의미없나요?
  • abu Saif al-Assad 2019/02/12 20:06 #

    목표에 따른다고 봐야죠. 검술 투로를 실제 움직임으로 되살린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당연히 있지만, 투로들을 종합하고 거기서 통합 검술 원리를 뽑아내어 이른바 조선 검술 체계를 만들어서 타류에 버금가는 유파 체계를 만든다는 목표라면 불가능하다 봅니다. 제가 당연히 과거에 안살아봤지만 사료로 유추할수 있는 점은 본문 그대로입니다. 당연히 고증과 연구로도 조선 당시의 미흡한 체계가 되살아날 뿐이지요.
  • ㅇㅇ 2019/02/13 15:16 # 삭제 답글

    조선 후기 (임란, 병자호란 이후) 에도 조선군의 백병전 실력이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었나요?
    조선도 양란 이후 삼수병 체제를 마련하고 원앙진도 도입하는 등 백병전 능력 향상에 꽤 노력을 기울인걸로 알거든요.
  • abu Saif al-Assad 2019/02/13 15:25 #

    그냥 반짝하고 만 것 같습니다. 이괄의 난 때만해도 항왜들도 있고 나름 수고를 들여서 육성한 것 같은데 나중에는 훈련도 대충대충 하는 것 같고 무예제보도 있는 줄도 잊어버렸다가 재발행하는 등 상태도 오락가락하고 주로 군대는 나태해지면서 훈련도 잘 안하고 그러다가 왕이 쪼이면 바짝 재정비하는 패턴인 것 같더군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냥 군영별로 투로 몇개만 선정해서 그거 하면 검술 훈련 끝이라는 식이고요.

    나태함 때문에 체계가 무너지는게 최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 umberto 2019/02/14 03:17 # 답글

    죄송합니다만, 군용검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무예도보통지 수준의 기술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현대 군대의 사격술로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훈련소에서 배우는 기본 사격술로도 일반 보병은 그럭저럭 싸울 수 있지 않습니까? 미국 사격장에서 가르치는 현란한 사격술이야 특수부대에게나 의미가 있지 그거 없어도 전쟁에서 이기는데에는 문제없죠.

    어차피 군대에서 단병접전이란 대열이 무너지지 않고 존버하는 쪽이 이기는 거라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 써먹을 일은 별로 없지 않을까요? 일대일 대결, 개인간의 결투에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대열 이루고 치고 받는 싸움에서는 단순한 몇가지 투로-교전 체계만으로도 전투의 승패에 큰 문제가 없을 듯 합니다. 아마 높으신 분들 관점에서는 전투의 승리를 위한 고만고만한 병사의 대량 육성만 이뤄진다면 나머지는 큰 관심이 없었을듯 합니다. 그렇다고 조선이 고급 기술이 필요할만큼 치안이 불안하거나 결투가 활발하던 나라도 아니니 그냥 그정도 수준에서 만족한게 아닐까요?
  • 오렌지 공작 2019/02/14 05:35 #

    중간은 가는게 목적이라면 그렇죠. 그이상이야 전쟁에 전쟁을 거듭해온 베테랑병사나 할법한 거고... 근데 집단대 집단이라지만 뭐가 그안에 치열한 개인대 개인의 싸움이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확신할 수는 없네요. 근데 검술을 일부러 책으로까지 낸 이유가 근접전에서의 멘탈보호를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마치 이렇게 하면 적 전차도 상대 가능하다~하는 대전기의 교범같이 말이죠. 더 큰 문제는 진짜 당나라 군대에 가까워졌을때 검술이고 나발이고 헐랭해져서 슬쩍 몰아붙이면 기세고 전의고 다 팽개치고 도망간다는게 아닐까요...

    사실 검술이고 배운게 없고 나으리들도 그런거 왜하나 하는 말을 하니 할 이유도 없고 그시간에 담배나 피워먹으면 좋죠. 그러니 왜놈들 들이닥치면 쫄리고 도망가죠. 저라도 그럴겁니다.
  • abu Saif al-Assad 2019/02/14 14:34 #

    왜검 교전 정도면 전쟁터에서 필요로 하는 수준은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는다고 봅니다.

    다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지금 남은 사료로 보면 과거 조선군영에서는 투로만 했고 투로로 평가하는 식이고 기본 기술이나 대련 시스템이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막상 실제로 붙었을 때 전쟁이나 민간 호신을 막론하고 크게 쓸모가 없습니다. 대련은 안해도 기본기술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알 수가 없거든요.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보가 그 기본기인데 무예제보만 해도 까먹었다가 다시 발행하고 했다가 결국 무예도보통지 시점에서는 왜검보가 사라져 있고요.

    물론 조선 군영에서 기본기술 패키지나 대련이 아예 없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당장 사료를 놓고 봤을 때 안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검교전할때 쓰는 피검도 원래 양날검으로 훈련하다 다치고 환도로 했는데 또 다쳐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라 카타 구미다치 수련할때 안전하라고 만든 것이지 대련용으로 만들었다는 정황도 없고요. 사료만 놓고 봤을 때 기본기술 패키지 수련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로만 하고 투로로만 평가하는 정황이 크게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상당히 나태해지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미 17세기부터 총기의 보급으로 백병전이 크게 후퇴한 서양도 기본 공격과 방어, 이를 조합한 기본기술 세가지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20세기 초반까지 유지했고, 기술이 단순하고 공방의 전개가 뻔할지언정 조금만 수련하면 즉시 효과를 본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봅니다.

    게다가 너무 이것저것 여러 검술을 중구난방으로 하는 것도 문제이고요. 서양이야 지역 연대나 지원병 연대처럼 아예 지방 귀족들이나 의용군이 기존 정규군과 별개로 편성되는 경우가 있어 이들의 검술이 다를 수 있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중앙집권하의 군대가 통합 체계 없이 각자 알아서 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고 봅니다.
  • 모아김 2019/02/14 11:48 # 답글

    1. 로마군도 조금만 평화로우면 갑옷이나 투구도 벗고, 행군훈련도 안하고 유약해져서 하드리아누스가 훈련규정을 만들어서 군기를 유지했던 걸 보면 굳이 조선군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검투사 경기도 후대로 가면서 자유민이 참가했고, 일종의 아마추어나 취미 선수군들도 있었다고 추정될정도로 나름 스포츠화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좀 천대받다 보니까 비르투스virtus나 무덕武德을 기르는 고상한 기예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런점에서 무도武道라는 개념으로 기예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일본이 오히려 이상한 것 같네요. 그리고 일본도 막상 제대로 훈련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겠나 싶습니다.


    2. 무예도보통지의 검술이 일본 명문 고류검술보다 떨어지는 검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별의 ‘초식’이라기 보다는 이를 분해해서 정제하고 기본기 중심이라는 점에서 일도류, 직심영류와 전반적으로 공통분모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부 사이프 님이 “고종 시대에 좋다는 총 아무거나 사다 무장시킨 것처럼 좋다는 검술 아무거나 들여다가 난잡하게 모아놓은 느낌”이라고 말씀하신대로 나름 괜찮은 검술들을 모아놓고는 하나로 꿰뚫는 체계를 만들지 못하고 깨작깨작 투로만 연습했다는게 문제인것 같습니다.

    애초에 제독검과 쌍수도는 거의 비슷한 투로이기 때문에 하나로 합쳐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전은 합 맞춰서 하기에 너무 길고, 왜검은 구미타치여야지 의미가 있는데 혼자서 연무하니까 뻘쭘합니다. 예도총도와 본국검 투로는 조선세법의 기본기를 다 포함하지도 못하고요.

    그렇다면 조선세법의 기본기 단세->기본기에서 비롯된 구미타치->후쿠로지나이 카타->하나로 끝내는 통합 투로->쌍검 투로->기효신서 등에 나오는 장도로 당파 맞서는 법 같은거 참고로 해서 창, 장도 등 이종무기에 맞서는 방법 이라는 구성에다가 호구 쓰고 대련을 하게 하면서 이를 평상시 관직을 얻지 못한 무반들이 활터 등에서 소일거리로 삼게 했다면 조선에 검술이 더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자기들의 고대 검술을 야마토류, 황국류라고 부른 것처럼 이렇게 구성된 검술은 조선류라고 붙여도 되겠네요.

    근데 봉두세, 호혈세, 등교세->일도류 하비키 1,2,3본 오모테노마키 表之捲, 우라노마키裏之捲, 스리코미擦込랑 비슷하고, 왜검기법 보면 일도류 인토 陰刀, 키리카에시切返, 치쇼地生, 노리미 乘身 등이 보이네요. 교전보는 직심영류랑 비슷하고요.

    김체건 이후로 조선검술의 정제, 체계화가 계속되었다면 의외로 결과물은 일도류, 직심영류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 abu Saif al-Assad 2019/02/14 14:24 #

    같은 생각입니다. 소스는 좋은 것들 모아 왔는데 개인의 노력으로 이뤄진 결과물조차도 전수되지 못하고 다수의 나태함에 묻혀서 흔적만 남았다는 느낌이네요. 이런 중구난방 상태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게 바로 본국검이라고 봅니다. 일본이 요시츠네를 검술의 선조로 규정한 것을 따라 황창랑을 검술의 선조로 규정하고 이른바 조선류를 만들고자 한 시도로 보여지는데, 각 검술에서 핵심을 뽑아 기본기와 기술 패키지를 재구성하기보다는 그냥 투로 통합버전으로 끝난 것에서 큰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인기도 없었던 것 같고요.

    서양식으로 기본기-기본기술 패키지-투로(플러리쉬)-대련체계-이종격검 식으로 구상했다면 국궁처럼 민속 스포츠로 남았을 수도 있고 그러면 씨름-택견-국궁-격검으로 계보가 확실한 4가지 전통무술로 남았을거라고 생각되네요. 그러면 지금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겠지요.
  • aa 2019/02/14 20:47 # 삭제

    어떤 일본인이 쓴 글을 보니 1930년대 천람시합을 현대검도의 시작으로 보더군요. 당시 참가자들이 대부분 고류 수련자인들인데 시합 스타일은 현대검도 스타일이라서 그런건데. 이건 영상화가 당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그런거고 실제로는 더 위로 올라갈수도 있는게 아닌가 싶은데. 생각하시기에 현대검도 스타일이 정립된건 어느정도 시기라고 보시나요.
  • 모아김 2019/02/15 11:54 #

    천람시합 즈음이라면 관이 주최하는 검도경기가 일반화되면서 지역단위에서 도장들끼리 친선경기하던게 사라지고, 군소류파들의 설자리가 없어지고, 도장에서 카타로 기본기를 배우고는 시합을 나가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죽도만 배운 검사들이 늘어나서 나이토 다카하루가 “일본검도도 이것으로 망했다.”라고 탄식한 시점이네요.

    약간 더 올라간다면 무덕회 창설, 검도가 정규과목이 된 시점이 현대검도가 탄생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예 위로 올라갈 것 같으면 오이시 스스무가 에도에서 5척2촌의 장죽도로 소동을 피운 이후에 4,5척의 장죽도가 유행이 되자 오다니 노부토모가 강무소의 죽도를 3척8촌 이하로 제한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시합을 하면서는 직심영류 같은 상단이나 팔상위주의 유파도 중단을 잡으면서 일도류 스타일로 수렴진화했다고 치바 슈사쿠유고집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미토번의 스이후류水府流 같이 번 단위에서 검술을 통합하기 위해서 통합 카타를 제정하는 시도는 있었지만 썩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다니 노부토모가 죽도 제한을 마련하는 것을 통해서 류파 통합을 죽도+호구 격검 시합을 통해서 하겠다는 걸로 천명한 것으로 실질적인 현대 검도의 시작으로 봐야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 이원상 2019/06/15 23:03 # 삭제 답글

    안타깝지만 조선에서 검술이라는게, 당시 무관들 사이에서도 안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습니다. 선조시기 병조판서가 무사라고 하는자들이 전부 활을쏘는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찌르고 베는거 시키면 누가 하겠냐고 말싸움하던 기록은 물론.. 심지어 검술에 푹빠진 선조가 기마술,궁술을 검술보다 먼저 취급한다고 자기팔을 꺾어버리고 활쏘기를 스스로 그만둔 무사도 있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반짝하고 식었다가, 후기에 들어오면서 여기저기 검법들을 얕고 넓게 끌어모와다가 편찬된 책 하나로 조상의
    숨겨진 비기비술 쯤으로 생각하고 어떻게든 뭔가를 하려고들 하는데..

    조선군이 바보라서 그런게 아니라 여러요인에 의해 장병무기들이 주력이 됬던거지, 어디 미개하고 모자라서 칼을 못쓰던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말입니다.
  • 이원상 2019/06/15 23:04 # 삭제

    조선에서 창검술은 결국 군대 훈련교보재 쯤으로 멈췄다고 생각합니다. 도장검술,유파등의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 abu Saif al-Assad 2019/06/16 00:36 #

    무예제보도 책 자체가 사라졌다가 다시 찾아내서 연습했고 왕의 의향에 따라서 백병전 무술의 훈련도 왔다갔다했지요. 그나마 금위영등록 보면 제독검이라도 주구장창 하던데 이거라도 다행이었다고 봐야되는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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