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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남부전선 근황 20180707 요르단 국경 장악, 두마 화학무기 이슈 시리아 내전



정부군이 보스라 알 샴의 반군들과 협상대로 요르단 국경지대를 장악했습니다. 이 맵은 이슬라믹 월드 뉴스의 맵인데 아직 반군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았음을 감안하여 초록색 반군 표시가 남아있지만, 페트로 루셈 맵은 사실상 정부군이 장악했음을 감안하여 정부군의 빨간색 표시로 메워놨습니다.


(정부군이 통제한 요르단 국경 검문소)


이 지역의 재장악은 거의 6년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르단이 이 국경지대를 통해 반군연합체 "남부전선"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해 왔으나 이번 남부 장악작전인 "현무암 작전(Operation Basalt)"에서는 미국도 불개입을 천명한 것도 있고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병력을 국경에 전개했을 뿐 남부전선을 전혀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르단도 무력을 이용한 정권교체 옵션의 실패를 깨닫고 커다란 난민 이슈와 세금 낭비, 치안 불안에 질려 대리전을 그만둔 것이지요. 애초부터 현명한 선택을 했어야 했습니다.

R&U비디오 제공 요르단 국경 장악 영상


한편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검문소들이 철폐되어 자유롭게 교통이 가능해졌습니다.


화학무기 금지지구(OPCW)의 도우마 화학무기 조사 초기 보고서

OPCW에서 사건 초기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4월 7일 시리아 다마스쿠스 교외 동부 고타 지대의 도시 도우마에서 정부군이 헬리콥터에서 2개의 사린가스 폭탄을 떨어뜨려 화학무기 공격을 했다라는 이슈가 터지고 나서 트럼프가 서방국가들과 함께 대량의 미사일을 쏘아 화학무기 연구생산시설로 지목된 곳을 박살내는 대공습을 펼쳤죠. 시리아 정부측은 OPCW를 초청까지 해가며 결백을 주장했고, OPCW는 엄청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단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주민들이 정부군이 인멸할까봐 몰래 따로 묻어놓은 희생자 시신까지 파냈으며, 주변 지역 시료를 가져가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좀 놀라운데 가스 공격에 당했다는 희생자의 시신에서 채취한 혈장 표본에서는 신경계 작용물질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가스로 죽은 게 아니란거죠. 한편 주변 지역에서 채취한 토양에서는 염소 화합물이 일부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인데 일단 친정부 측에서는 거보라고 반군과 서방의 구라가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하고, 반정부 측에서는 토양에서 염소화합물 검출되었다는 이야기만 확대 전파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취재했던 서방측 기자들은 의사들이나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가스가 쓰인 게 아니며 폭격으로 인한 먼지구름이 사람들이 숨어있던 방공호로 몰려왔고 저산소증과 먼지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누가 가스가 터졌다고 소리치자 모두 패닉에 빠졌던 거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에 좀더 신빙성을 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하기야 트럼프 공습에 박살난 이른바 화학무기 연구생산시설이라고 지목된 바르제 연구소는 2017년 OPCW의 강도높은 조사를 두차례나 받고 혐의 없음으로 판정났지만 트럼프는 응 아냐 하는 식으로 공습을 강행해서 건물을 그냥 철거시켜버리다시피 해버렸는데, 똑같이 도우마 화학무기 이슈 자체가 해프닝이었다고 볼 가능성이 더 높아진 셈이지요.


The Big Agreement of Damascus With Syrian Kurds; The Content of the Agreement

쿠르드족과 정부간의 협상이 점점 가시화되어가고 있네요. 쿠르드족은 터키의 이프린 진입을 방관하고 만비지 시에서 쿠르드를 철수시킨 미국을 더이상 신용하지 않고 그대신 유화책을 제시한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의 협상안에 더 이끌리는 모양새입니다. 쿠르드와의 협상에는 아사드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부 대표단이 라카 주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정부측의 요구조건은 기존에 알려진대로

1.쿠르드족의 모든 사진, 상징, 깃발과 특히 압둘라 외잘란(PKK사령관)의 사진을 제거할 것.
2.하사카 시의 모든 모병 사무소 복귀.
3.하사카(시리아 북동부 국경도시)의 시내에 쿠르드족과 정부군의 합동 검문소 설립.
4.쿠르드족 YPG는 시리아 군대에 입대할 것.
5.동쪽의 이라크로 향하는 탈 코자르, 야라비야, 시말카 국경검문소, 북쪽의 터키로 향하는 데르바시야, 라스 알 아인 국경검문소를 시리아 정부에게 양도한다.
6.하사카 주 르멜란과 랍세의 기름/가스 유전을 시리아 석유부에 넘기고 통제를 받을 것.

여섯가지 안이고, 정부는 쿠르드측의 요구사항인 석유부에 쿠르드족의 자리를 보장할것과 쿠르드어를 공식 교육에 포함시키는 안을 받아들일 것 같은 상황이네요. 결국 쿠르드는 터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하는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청산하고 시리아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하고 이프린 등에서 터키와 터키 괴뢰반군을 몰아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사실 원래 쿠르드족은 시리아 정부와 장기간 밀월관계를 지속했는데 터키의 쿠르드족 반군인 쿠르드노동자당(PKK)는 90년대 내내 터키군과 전쟁을 치뤄 터키 동부는 장기간 내전상태였고, 그 PKK에게 무기와 자금을 댄 것이 바로 시리아 정부였습니다. 그 이유는 시리아 정부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부였고 레바논 내전이나 주변 분쟁에서 좌익 세력에 지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PKK는 원래 쿠르드민족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했었고요. 지금처럼 신좌파로 돌아선 건 PKK수령 압둘라 외잘란이 감옥에 수감되고 나서 사상 변화를 겪은 탓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군(PLA)같은 좌파 반군이 내전에서 시리아 정부를 지지해온 것이고요. 여하간 시리아 쿠르드족은 그냥 PKK지부나 다름없는데, 결국 다시 원래 동맹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겠네요.

한편, 터키 괴뢰 반군 근황.....
....지도의 상태가?

그리고 독재자를 몰아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근황...

수도 트리폴리 주변을 통제하는 무장세력들 숫자를 세어보세
서방언론에서 절대로 보도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핑백

덧글

  • 발키리레나스 2018/07/07 23:38 # 삭제 답글

    한국언론에서도 신경가스가 안나온것은 쏙빼고 염소가스이야기만 적어놓았던군요. 문제는 염소가스 조차도 자이쉬알이슬람은 염소가스생산시설이 있어서 언제든지 염소가스쇼를 벌일수 있다는 겁니다.
  • 발키리레나스 2018/07/07 23:44 # 삭제 답글

    요번에도 반군들이 독가스쇼를 벌일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도 서방과 미국이 속으면 정말 바보인증이지요.
  • 드사아 2018/07/08 01:48 # 삭제 답글

    아무리 독재국가니 뭐니 해도 남의 나라 함부로 뒤집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서방이 이번 기회에 단단히 깨달아야하는데 말입니다. 제대로 처리를 해줄 것도 아니면서.
  • ㅇㅇ 2018/07/08 02:37 # 삭제 답글

    리바아 문제는 걍 사르코지,힐러리가 제일 죽일놈들이죠. 그당시에 서방이 카다피 비난은 하면서도 직접개입에는 조심스런 분위기였는데, 그 둘이 유독 무슨 민주주의 구원자라도 된양 제일 적극적으로 날뛰더니 결과물은 ㅋㅋㅋㅋ
  • abu Saif al-Assad 2018/07/08 03:28 #

    사르코지가 대체 왜 그렇게 발광을 하고 로비에스피에르 납시셨나 했는데 카다피에게 받은 대선자금 감추고 인멸시키려고 그랬던 거였지요. 그렇게 남아 나라 말아먹고도 결국 대선자금 문제로 재판중이니 ㅉㅉㅉ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7/08 02:51 # 답글

    1. 100% 진압보다 협상과 현실적인 이유들이 이 내전을 정리한 셈이네요. 전쟁을 잘해도 국제정세, 정치적-사회적 요인 등. 복합적인 이유들이 진행되면서 내전을 차근차근히 정리되지만... 잠재된 반군 세력들과 외부의 적들이 또 한 번 뒤흔들거나 터뜨리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죠.

    2. 화학무기 보고서. 이젠 언론들이 시리아를 보도하는 것보다 여기에서 시리아 소식을 전한게 더 신뢰가 갑니다.

    3. " 그 이유는 시리아 정부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부였고 레바논 내전이나 주변 분쟁에서 좌익 세력에 지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PKK는 원래 쿠르드민족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했었고요. 지금처럼 신좌파로 돌아선 건 PKK수령 압둘라 외잘란이 감옥에 수감되고 나서 사상 변화를 겪은 탓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군(PLA)같은 좌파 반군이 내전에서 시리아 정부를 지지해온 것이고요. 여하간 시리아 쿠르드족은 그냥 PKK지부나 다름없는데, 결국 다시 원래 동맹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겠네요. "

    - 하페즈 통치 시기였을텐데... 그때 시리아 정부가 좌파 정부였었나요? 좌파 반군이 지지와 지원? 어안이 벙벙합니다.

    4. 터키 괴뢰 반군의 사진에 나온 지도야말로 에르도안의 진정한 야망(?)이 아닌가? 터키인들의 내면인가 싶습니다.

    5. 아랍의 봄의 이면이죠. 이슬람주의가 컸지만, 카다피 집권기에 자신에게 옹호적이거나, 자신의 세력에 속한 부족들에게 온갖 지원과 특혜를 줬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별을 가하고. 경제적인 문제와 카다피 집권기에 내재된 시한폭탄들이 터졌지만.... 이 아랍 특유의 부족주의와 이슬람주의, 혁명기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뒤섞이면서 이렇게 터져버렸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언론들이 더욱 싫어집니다. 한국은 주류 언론들의 소식을 번역만 하고 따라간다는 미주중앙일보의 비판이 떠오르네요. 하긴... 시리아, 아랍 정세의 책들도 이런 불편한 진실이 없죠. 뭐, 있어도 어느정도는 다루지만요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13시간(원작 13시간 책이 나오길 빕니다)이 언론보다 나을 지경입니다.
  • abu Saif al-Assad 2018/07/08 03:26 #

    원래 시리아의 집권당 바트당이 표방하는 바트주의가 사회주의+아랍민족주의를 섞은 겁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에는 많이 자본주의화됐는데 하페즈 알 아사드가 집권하기 이전 바트당 집권기부터 알레포 지역의 대지주들의 땅을 몰수하고, 대상인들의 자산을 몰수하고 분배하는 식으로 공산주의스러운 개혁을 단행했었고 소상공인들의 사유 재산만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한사람이 주인이지만 바지사장 내세워 5개의 개별 공장을 운영하는 식으로 편법을 많이 썼고, 땅을 빼앗긴 명문가들은 결국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면서 내전의 또다른 씨앗이 뿌려졌었죠. 또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한 덕택에 소련과 우호적이기도 했습니다. 소련-러시아와의 동맹은 그때부터였고요. 시리아가 이란인들의 상주를 허용하여 헤즈볼라를 지원한 것처럼 시리아도 비슷하게 행동했습니다. 소련과 시리아가 PKK를 지원한 건 냉전 당시 터키가 NATO의 최전방 국가였으며 동구권과 적대 관계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그룹들 중에선 사회주의 계열이 제법 되지요. 터키 레지스탕스, 팔레스타인 해방군, 리와 알 쿠드스 등...

    냉전 시대만 해도 이런 내전이나 테러가 아주 많았었지요. 요즘 워낙 TV나 유튜브에 전쟁 내전 영상 많이 올라오기 때문에 요즘이 더 심한 것 같지만 그건 우리 눈에 많이 보이기 때문이고 민간인 학살, 불법 고문, 시가지가 박살이 나고 그런 모습이 요즘은 어디 제3세계의 전유물 같지만 최고 선진국이라던 영국이 그러고 살던 게 90년대까지의 모습입니다. 아일랜드 완전독립을 추구하는 IRA가 영국과 테러항쟁을 거듭했고요. 그뿐만 아니라 더 많은 나라가 더 많은 내전을 최대 스폰서인 미국/소련의 이념 수출 의도와 맞물려 수행했었습니다. PKK와 시리아의 관계는 그런 면에서 봐야겠지요.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7/08 03:30 #

    여기에도 비하인드 스토리(이스라엘, 이슬람주의 등)가 있겠지만 시리아의 비극이 바트당과 하페즈한테도 책임이 있네요.

    리비아, 알제리 등. 아랍의 봄을 겪은 국가들 중. 반군들과 군벌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한 국가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싶으면서도, 영화 13시간을 보고나서 서방세계의 잘못이 훨씬 크구나 싶습니다. 미주중앙일보에서 뱅가지 스캔들을 보도한 언론이 없다면서 말한 것처럼, 저도 사르코지와 카다피와의 관계를 여기서 듣게 알게 된 겁니다. 이 트리폴리의 반군 배치 사진을 보면서 이 아랍 특유의 부족주의와 이슬람주의, 혁명기의 문제, 서구 열강의 잘못들이 언제쯤이면 좋아질지, 언론들이 불편한 진실을 보도나 할까? 싶습니다.
  • 수호이 2018/07/08 10:19 # 삭제

    카다피와 사르코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내전발발당시인 2011년에 서구언론이나 그걸 인용 보도한 우리나라 언론에도 제법 나왔습니다. 2011년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는 유로 뉴스에 “사르코지는 리비아로부터 선거 자금으로 받은 돈을 돌려줘야 한다. 우리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죠.
    사르코지가 카다피로부터 660억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문제로 올해 3월에 48시간 구금조사까지 받았습니다.물론 사르코지는 부인하지만요...
    그나저나 알 이슬람은 연말 리비아대선에 출마한다고 하는데 당선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원래 이 양반은 카다피집권때에도 개혁파라서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죠.만약 카다피가 알 이슬람에게 조기에 정권을 이양하고 은퇴했더라면 리비아내전은 없었을 가능성도 높았는데,,,뭐 세상일이란 알 수 없기때문에...
  • 제트 리 2018/07/08 09:46 # 답글

    그들도 긴 내전에 지쳤다는 반증이 아닐 까 싶네요... 리비아 문제는... 서구권의 오판 이 빗어낸 참극 인 거 같네요.... 그리고 쿠르드족은 편할 날이 없군요
  • KittyHawk 2018/07/08 13:30 # 답글

    리비아의 경우 카다피가 그 정치적 노회함을 제대로 발휘 못했던 것도 컸다고 봅니다. 권좌에서 물러나겠으니 서구 국가들이 그 중간에서 중재를 서달라는 등의 대응으로 무력 사용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고 시민들의 급진성도 바람을 빼버렸어야 했는데 카다피의 내전 초기때부터의 행보는 너무 허술한 감을 지우기가 힘들더군요. 대체 그는 뭘 믿었기에?
  • 아사드 2018/07/08 18:40 # 삭제 답글

    리비아는 사실상 국가가 해체되어 버렸네요
  • 아사드 2018/07/08 20:08 # 삭제 답글

    시리아가 아랍의 봄 이후 내전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과정은 이란 혁명 과정이랑 거의 동일했다고 봅니다.

    이후 시리아와 이란의 길이 달라진 것은

    지도자의 의지 차이였습니다.

    팔레비는 정권을 버리고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것을 택한 반면, 아사드는 시리아가 이란 꼴 나는 것을 못참고

    저항하길 택했다는 차이가 있지요.



    돌이켜 보면 팔레비가 내전을 무릎쓰고라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한판 대결을 펼쳤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네요. 엄청난 유혈사태가 벌어졌겠지만,


    이란 혁명 이후의 피바다를 생각해보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희생이었지요. 저는 팔레비가 그 자리를 지키고

    하페르처럼 하마 전투(하마 학살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시각)를 치르더라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쓸어내버렸어야 했다고 봅니다.


    아사드가 초반에 초기 진화 타이밍을 놓치긴 했지만, 이후의 대응은 좋았다고 봅니다. 러시아를

    끌어들인 타이밍도 좋았고요.
  • 수호이 2018/07/08 23:16 # 삭제

    팔레비의 경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시리아는 다수종파인 수니파다수가 세속주의자고 아사드를 지지하기때문에(아사드부인도 알레포의 수니파명문가 출신입니다) 버티고 버텨서 결국 내전에 승리하게 되었지만 팔레비는 이란내 지지세력이 거위 없었습니다.내전은 커녕 도주하지 않았다면 이라크 왕국의 파이살 2세와 왕족들처럼 끔살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이란혁명은 호메이니등 근본주의세력만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거의 모든 이란내 정파가 참여한 겁니다.다만 근본주의 세력이 호메이니란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겁니다. 그러니 팔레비가 직면했던건 근본주의 세력만 아니라 이란의 모든 정치세력, 국민과의 싸움이었던겁니다. 오히려 팔레비가 신병치료차 도주했던 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파이살 2세와 그 가족처럼 두들겨 맞다가 기관총으로 살해당하지 않았으니까요...
  • 아사드 2018/07/08 23:43 # 삭제

    시리아 내전 초기 상황을 보면 팔레비 비슷하게 암울합니다. 시리아에서 수니와 시아/알라위라는 대결구도가 세속주의 vs 와하비즘으로 전환된건 아사드가 버티고, FSA로 대표되는 세속주의 반군들이 와해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입니다. 그 이전의 상황은 아사드가 더 급하면 급했지 나을건 없었지요.

    팔레비가 그 당시 암에 걸려서 권력의지를 못 보여준게 아쉬울 뿐이지요. 무슬림 형제단이 정권을 장악한줄 알았던 이집트가 한순간에 다시 뒤집혀버린 것처럼, 핵심은 결국 군부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사람을 내세울 수 있냐 없냐에서 결정이 나는 것이죠. 호메이니를 귀국못하게 하고, 군부의 지지를 얻을 만한 사람에게 권력을 이양했다면

    이란은 어쩌면 선진국의 위치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 수호이 2018/07/09 00:11 # 삭제

    팔레비 아니 팔레비왕가자체가 이미 국민의 지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군부가 나서 봤자 오히려 군인들은 총부리를 왕가로 돌렸을 겁니다. 당시 황태자도 건재했는데 팔레비가 권력을 물려주지 못하고 도망친건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다시 설명드리자면 이란혁명당시 팔레비를 지지한 건 소수의 왕당파뿐이었습니다.이들도 모두 외국으로 도망쳤지요.팔레비가 상대해야하는 건 근본주의세력만 아니라 소수 왕당파를 제외한 이란의 모든 정치세력과 국민들이었습니다.
    아사드는 여전히 과반은 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때문에 버텨서 승리할 수 있었던겁니다.
    그에 반해 팔레비는 이란 국민들에게는 "천하의 개쌍놈"정도의 취급밖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괜히 2천만명이 넘는 이란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인게 아닙니다.
    혁명당시의 이란과 지금의 시리아와는 아주 다른 상황입니다.
  • 아사드 2018/07/09 00:26 # 삭제

    이란 민중이 등 돌린것이나, 시리아 사태 초기에 아사드 퇴진 요구 빗발친 것을 보면 비슷해보입니다만. 그 당시 이란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만화가 페르세폴리스이죠.

    이슬람주의자들의 난동을 초반에 때려잡지 못한게 큽니다.
  • ㅇㅇ 2018/07/10 00:18 # 삭제

    이란은 시아파/페르시아 정체성으로 살펴봐야합니다. 수니파의 정신세계와는 또 궤를 달리하는 곳이지요. 팔레비는 뭘해도 망할 운명이었습니다.
  • 수호이 2018/07/09 01:01 # 삭제 답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란을 잘 모릅니다.
    이란의 이슬람주의는 이란사회 그 자체입니다.그래서 이슬람주의자들을 토벌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이란이 시아파국가가 된건 사파비왕조때 부터인데 원래 사파비란 명칭은 이란의 수피즘 단체의 지도자명칭 즉 교주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주였던 이스마일 1세가 다른 중소국가들을 쓸어 버리고 건국한게 사파비왕조입니다. 따라서 사파비왕조자체가 신정국가였습니다.사파비왕조의 "샤"는 정치지도자인 동시에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오늘날의 이란 신정국가와 비슷한 체제였습니다. 이러다가 사파비왕조가 멸망하면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분리되어서 카자르왕조와 팔레비왕조가 뒤를 이었지만 이란사회 전반은 여전히 사파비왕조때의 체제 즉 시아파 성직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였습니다.
    팔레비왕조의 건국자인 팔레비 1세는 원래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린 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처럼 이란을 세속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시아파 성직자들의 반대로 왕조를 개창하게 된 겁니다.그래서 이 양반은 성직자들을 엄청 싫어했는데 아들 팔레비 2세도 그 영향인지 성직자들을 엄청 탄압했습니다. 그 대표가 바로 호메이니입니다. 물론 근대화를 위해선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제한하는게 맞지만 그 방법이 너무 형편없었서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버립니다..더구나 팔레비 2세가 석유국유화를 추진했던 모사데크총리를 실각시키는등 서구세력릐 앞잡이역할을 단단히 해서 국민들의 불만을 산데다 그걸 또 비밀경찰을 통해 눌러버리고 부정부패에다가 경제적 불평등 1970년대 중반부터는 국가막장상태가 된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호메이니는 거의 구세주정도의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니 팔레비가 근본주의세력을 소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란사회는 여전히 성직자들의 영향력하에 있었고 결국 이란혁명에서 근본주의세력이 승리한 것도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파비왕조 설립후 400년간 특수한 이란의 상황입니다.
    이걸 이해 못하면 현 이란 신정체제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듭니다. 지금의 신정체제는 사파비왕조때로 회귀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그때는 왕조고 지금은 공화국이지만요.

  • 수호이 2018/07/09 20:36 # 삭제

    덧붙이면 현재 이란 신정체제를 근본주의로 보기에는 좀 그렇습니다.신정체제는 시아파의 이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정통혈통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수니파는 굳이 무함마드혈통이 아니더라도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태도였습니다.척 보면 왜 수니파가 이슬람에서 다수파가 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수니파가 시아파에 비해 월씬 개방적인 태도였고 실제 정통 칼리프시대이후인 옴미아드왕조때부터 이슬람국가들은 그냥 세속주의국가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아파는 칼리프시대 이후에는 이맘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는데,이맘도 역시 무함마드혈통이어야만 합니다
    사파비왕조를 창건한 이스마일 1세도 지금 이란 시아파의 주류인 12 이맘파중에서 7대 이맘의 후손이라고 자칭합니다.물론 실제론 이스마일 1세는 쿠르드나 투르크혈통이라는게 함정이지만요.
    중요한건 이맘에 의한 통치가 시아파의 이념이기때문에 사파비왕조 이전의 많은 시아파국가들도 이런 이념을 실현시키려고 하지만 모두 실패합니다.이유야 지배층인 시아파는 소수이고 지배를 받는 국민들은 수니파이기때문에 타종교처럼 강제개종을 시킬려면 국가가 붕괴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파비왕조만이 이걸 성공했고 지금까지 이란사회를 특징짓는 체제가 만들어진 겁니다.

    원래 이란도 사파비왕조이전에는 수니파가 다수였습니다.
    이스마일 1세가 사파비왕조를 수립한 후 이란전역에 시아파성직자들을 보내서 주민들을 시아파로 개종하는 작업을 합니다.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아파학교를 만들고 행정을 장악해서 주민들의 편의를 돌보고 상담역할등 자연스럽게 시아파로 개종하게끔 했고 결국 이란에서 시아파가 다수가 되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란전역에 시아파성직자들의 권위가 확고하게 내리고 지금까지 이어진겁니다.
    이때문에 다른 중동국가들에게사파비왕조는 악마취급받습니다. 사파비왕조가 없었으면 이슬람권은 여전히 수니파헤게모니가 장악하고 시아파는 소수로 남아 목숨이나 구걸해야 했을테니까요.
    더구나 사파비왕조가 설립된곳이 하필이면 아케메네스왕조부터 자긍심높은 페르시아,이란이니까요.
    종교적 열정과 역사적 자긍심이 결부된 힘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
    솔직히 다른 중동 왕정국가들은 역사적으로는 이란한테는 명함도 꺼내지 못합니다.특히 사우디 아라비아는 뭐...이슬람의 발흥지라는 것빼고는 옴미아드왕조때부터 20세기 석유발견까지는 그냥 촌동네라서 은근히 사우디사람들이 이란에게 묘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타 중동국가에서 이란을 욕할때 저 "사파비놈들"이라고 합니다. 사파비왕조의 건국은 이란역사만이 아니라 중동,이슬람권의 운명을 바꾼 사건입니다.

    시아파성직자에 의한 이란사회지배를 깨부수려고 한 사람이 팔레비 2세였습니다
    방향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이런 이란의 특수성을 망각하고 성직자들과의 타협,합의 없이 무조건적으로 탄압 일변도로 나가니 당연히 반발이 심할수 밖에요. 더구나 팔레비왕조자체가 부정부패,인권탄압 등 문제투성이라서...
    그나마 사파비왕조멸망후 이란혁명까지 이란과 다른 중동 왕정국가들의 사이는 괜찮았습니다. 종파는 달라도같은 세속주의 왕정이라서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에 이란혁명이 일어나 시아파성직자에 의한 신정국가가 성립하자 중동 왕정국가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합니다.사파비의 재건이니까요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시아파에 의한 신정국가에다가 왕정을 뒤엎은 공화국이고 인근 이라크,사우디,바레인 등 인근 국가들에 시아파가 제법 있어서 이란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좌불안석이었죠.더구나 이라크와 바레인은 시아파가 다수 종파였으니..그래서 중동 왕정국가들이 후세인을 꼬셔서 이란-이라크전쟁을 일으키게 만들겁니다.물론 후세인 자신의 야심도 컸지만요.결과적으로는 혁명의 수출을 저지했으니 성공한거죠.
    이시기의 중동왕정국가들의 불안은 최고조였습니다.이란의 시아파 신정국가에다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으로 시아파 이단놈들과 빨갱이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전복할수도 있다는 것때문에 양쪽에 엄청난 돈을 들여 개입해서 모두 영향력을 차단하는데 성공했지만 아프가니스탄쪽에서는 참전전사들을 중심으로 수니 이슬람근본주의가 확산되어버리고 맙니다.뭐 자국내에서는 어떻게든 통제는 하고 있지만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 바람에...

    600년전의 사파비왕조의 성립이 지금까지도 중종전세계에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킨걸 보면 참 역사란게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의 경우를 보면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를 변혁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스카라드 2018/07/09 11:11 # 답글

    이 문서를 시사인(굽학아세 선생)과 한겨레,경향 신문에서 아주 싫어할겁니다.(-_-) 언제부터인가 진보 여론은 시리아 내란에서 관심을 끊어버렸지요. 방송에서는 불쌍한 아이들 도와달라고 후원금 광고는 많이 나오는데.....(...) 비극입니다.
  • 2018/07/09 17: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7/09 21: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드사아 2018/07/10 00:09 # 삭제 답글

    근데 다라 지역의 ISIS연계 세력들은 전투력이 어느 정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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