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호방주, 아니 지금은 인권운동가이신 진기서께서 각 진보단체장들을 모아놓고 하는 말이란 하나하나가 상상 이상이었다.
"전습대란 단순히 친일 극우 자경단이 아닙니다. 이들은 현 정부의 거대한 음모의 첨병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만 것이죠. 뭐 뿌리부터가 친일 반민족인 이 정부입니다. 개의 자식은 개란 거라고나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진실이란 게 늘 그렇지만 충격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뒤이어 나오는 것은 김황식 총리가 원곡고 출장본영에 밤에 몰래 방문하는 것을 찍은 스틸샷이었다. 뒤이어 스틸샷뿐만 아니라 정부 고위관리들이 야심한 시각에 몰래 방문하는 CCTV영상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낱 지방 자경단 따위에 왜 고위급 인사들이 방문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희는 다행히도 마지막 양심을 버리지 않은 내부 고발자들 여러분 덕분에 더 추악한 음모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거짓말이야!! 정부 관리 같은 건 한명도 근처에도 온 적 없었어!!"
요시노부가 교실 바닥을 카타나 칼집 끝으로 내리치며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건 모두 조작이다. 출장본영에 드나드는 정부 요인은 한명도 없고 공무원으로 따지자면 김형사나 몇몇 공무원들이 연락 협의차 왔다갔다 했을 뿐, 제갈 진욱조차도 두번에 불과했을 뿐이다.
"왜 이런 상황에 안산시의 치안에 갑자기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며, 전습대라는 자들은 무슨 수로 총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걸 공인까지 받았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동북 일본인들을 한국에 받아들였으며, 왜 그것이 안산시의 좋은 주택들과 아파트가 밀집한 신시가지에서 이루어져야 했을까요? 왜 일본 자본의 투자가 그것과 동시에 이루어졌습니까? 왜 전습대는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을 탄압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았죠?"
그리고 뒤이어 예전 주공아파트에서 일가족이 단체로 추락하는 영상, 그리고 그 남편이 나에게 덤벼들다가 일본육군 발도술 4본 후적(後敵)에 의해 맞아죽는 영상이 나왔다. 그날 흑호방주 저놈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있다가 나를 보곤 오토바이로 도주한 날의 영상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퍼즐이 맞기 시작한 거죠. 정부는 좀비사태로 황폐화된 경기도,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지인 경기도를 제 2의 일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일본인들이 이주하고, 일본 자본이 투자하고, 일본인들이 기업을 세우고 경제를 차지하면... 그 다음은 정치죠. 이순신 장군과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나라를 이 정부는 일본에게 넘기려고 한 겁니다. 하층민과 싸이코패스가 인솔하는 앞잡이들을 이용해서 말이죠. 뭐, 남경대도살의 산실인 일본육사를 나오신 모 대통령님의 따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돌아보면 이제와서 놀랄 것이 있겠습니까?"
하며 미소짓는 흑호방주의 면상은 참으로 영원히 웃게 만들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뒤이어 그는 정부 내부 문건이라며 증거들을 계속해서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미 포털사이트들은 이 내용을 실시간으로 받아적는 기자들에 의해 도배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고 SNS는 폭발하고 있었으며, 정부를 저주하는 여론은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을 지경이었다. 증거를 하나 하나 공개한 흑호방주는 갑자기 정색하며 진지하게 카메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러분, 지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정부가 저를 비롯한 지사들을 유언비어 유포와 폭력사태 주범으로 체포하겠다고 한답니다. 하하하..."
흑호방주가 웃으며 주변인들을 돌아보자 다들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가벼운 웃음의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 흑호방주는 마치 유머러스한 토크쇼를 보는 듯한 여유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의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정의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강고한 권력의 성채, 부패한 앙시엥 레짐이 민중의 힘에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지 말입니다. 68년의 파도가 다시 한번 세상을 후려칠 것입니다. 지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니 정말 정의는 막을 수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러나 보면 웃음도 나오는군요. 다리 사이에 달린 그건 부랄입니까? 그게 달려있다면 달아놓은 값어치를 하시죠. 집에서 키보드로 분노해봐야 전기 신호만 조금 늘어날 뿐입니다. 부패 권세에 아무런 데미지를 못준단 말입니다. 키보드로 분노하지 마시고 거리로 나오십시오. 정부가 여러분의 몸을 지킬 도구까지 뺏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뿌리부터가 더러운 이 정부가 말입니다. 키보드 자판을 누르지 말고 키보드로 후려치세요. 검과 창을 장식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해 휘두르세요. 그건 폼잡을려고 산겁니까? 어려워 보입니까? 불가능하고 안될 것 같습니까? 4월 19일은 그럼 무슨 수로 이루어졌으며, 87년 6월은 어떻게 된 겁니까? 기억하십쇼. 민중이 막을 수 없는 정의를 보여줄 때 비로소 역사가 움직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거리로 나서십시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외국인이 이런 말 하게 만들지 말란 말입니다!!"
이게 대중집회였다면 폭풍과 같은 환호성이 이어졌을지도 모를 말빨이다.
"이제 저희는 시민 동지를 경찰과 전습대의 살인 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들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전습대에 단단히 경고합니다. 이미 권력의 개 사법부 따위의 허울 좋은 법놀이는 종잇장만한 권세도 잃었습니다. 절대적인 정의가 지배하는 역사의 법정은 매국노 전습대에 이미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니 전습대는 똑똑히 들으시죠. 지금이라도 명단을 바치고 우리 구국의 강철대오에 자수하고 시민 수호를 위해 봉사한다면 그나마 벌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민족을 고수한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알아서 처신하시죠."
씨익 웃는 흑호방주를 마지막으로 영상은 뉴스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사람을 해체하여 팔아먹는 인간쓰레기가 감히 주둥이를 나불대!?"
김석원의 분노에 찬 고성과 함께 누군가의 소유였을 책상 위의 모니터와 책들이 한꺼번에 쓸려 내던져졌다. 야스스케도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고 요시노부는 참담한 표정이었며 사부로 이상평은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김책 동지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린 듯 전신에서 피로와 자포자기의 기운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앞으로 흑호방주가 어떻게 판을 키울 것인지 궁금해졌다.
"허무도, 전직 운동권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
"이제... 일단 사람이 모이는 게 중요하니까 사람 모이기 좋은 광장이나 지역에 먼저 선발대가 나가있을 겁니다. 그리고 SNS를 이용해 참여를 선동하고, 친구들 아는 대로 다 불러모을 겁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참여하라고 소리치겠죠. 그러면 마지막 망설임도 끊어집니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원하는 지역으로 대중을 유도해서 규모를 크게 키울 겁니다. 그러면 곳곳에 분산된 끄나풀들이 수뇌부의 지령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관공서, 경찰서 뭐 원하는 대로 이동하는 거죠. 그러면 충돌이 생길 겁니다. 그러면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이나 크게 다친 사람들을 병원으로 옯깁니다. 그런데 반드시 사람들을 통과해서 많이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만일 관공서 건물이 한곳이라도 함락되면, 더 커질 겁니다. 그러면 전국적인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거죠."
"...진압은 가능하겠지?"
요시노부의 질문이다.
"어떤 시민폭동도 군대를 이길 순 없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도 결국은 진압당했습니다. 지금은 더 쉽겠죠. 하지만 이 정부에 그만한 배짱이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배짱이 있다면 곧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출동할 겁니다."
요시노부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지만 저들이 아무리 우리를 잡는다고 말해도, 이미 모든 문서와 자료는 완전 파기되었다. 대원들이 전습대 티를 내지만 않는다면 안전할거야. 곧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니 우리는 며칠만 버티면 돼. 내가 매입해서 개조한 안전 가옥이 몇군데 있다. 다들 그곳으로 피난하고 조금만 버티면 된다."
요시노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일어섰다.
"다들 지금 바로 출발하자. 관용차량과 개인 차량을 이용하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저는 안 갑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흑호방주가 지금 저기 있는 이상 제가 그를 놔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요시노부의 표정이 급히 일그러졌다.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듣자하니 흑호방주의 주변에는 녹두대가 포진하고 있다고 하고 언제든지 깡패들도 증원될 수 있다. 모르진 않겠지. 죽으러 가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아직도 몸에 열세자루의 칼을 꽂고 미나토가와의 마사시게처럼 죽겠다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느냐는 말이다!!"
"됐습니다.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나 흑호방주는 반드시 죽여야만 합니다. 그는 혼자서 전국의 진보세력을 규합하였고 전습대를 파멸시켰으며 정부조차 위기에 몰아넣은 자입니다. 단 한명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명단 없다고 전습대원과 그의 가족, 간부들과 친지들을 못 찾아내겠습니까? 설사 우리가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숨어서 산다고 한들 저자의 집요한 추적과 보복에 노출되지 말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럼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더 큰 후회와 고통 속에서 종국에는 그자의 인체 개조 예술의 재료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너는 왜 항상 한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나, 그는 이미 수배령이 내려진 자야. 계엄군과 경찰이 철저하게 수색하고 체포할 것이니 걱정 말고 지금은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라. 저 아이(김아무개)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죽겠다는 것인가? 애초에 사람 몇명이 합류한다 한들 수백명 이상의 세력을 어찌 이기겠는가? 이미 전습대는 해체되었고 대원들은 없다!"
"안되면 사흘이라도 숨어있다가 야습이라도 하겠습니다. 흑호방주는 원래 신분 이름 없이 살아가던 자, 계엄군은 물론 경찰조차도 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분이야 위조하면 그만이고 얼굴이야 갈아치우면 그만인 자죠. 영원히 어둠 속에 숨어버리면 앞으로 슬픔에 분노하고 증오에 미친다 한들 절대로 그를 찾아내기는 커녕 얼굴 한번 볼 수 없게 될 겁니다. 더군다나 그만한 조직력을 가진 자라면 앞으로 동북 일본인들을 참담한 처지로 몰아넣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동북인들의 대부시라면 더더욱 저를 놔두셔야 합니다."
요시노부의 표정은 점점 비참해져가고 있었다.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젠 총알은 커녕 사람도 없어. 우리 모두가 다 간다 한들 개죽음 뿐이다. 더군다나 너는 나의 첫 가신이다. 첫 가신을 이렇게 보낸다면 동북인들에게 무슨 염치로 도쿠가와의 이름을 내세운단 말인가!"
책상을 내려치는 요시노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가신이라...
"진보 슈리의 일이라도 생각이 나셨습니까, 과거에 연연하는 자는 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서 나가려고 하는데 발소리가 하나 더 울렸다. 뒤를 보니 성난 얼굴에 눈가는 젖어있는 김 아무개이다.
"나도 따라갈거야!"
나를 올려다 보는 김 아무개를 보니 그녀와 함께했던 몇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다.
"너와 같이 살게 된 건 처음엔 해프닝에 가까웠었지... 누군가는 짐을 떠맡았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고... 사람들은 내가 너를 돌봐준다고 말한다지만 그렇지 않아. 황량해진 집안에서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전부였던 나날과 비교하면 네가 화를 내도 나는 활기를 찾을 수 있었고 가끔씩 보여주는 미소에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어. 그러면서 점점 집에 오는 게 즐거워졌어. 네가 있었기에 나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었어. 나는 너에게 구원받은 거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점점 너를 위하여 삶을 다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네가 알아주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어. 내가 그러고 싶었으니까.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것도 그것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죽는다면 나는 심장이 찢어지다 못해 저승에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으로 스스로 내려가게 될거야. 그러니... 따라온다는 말은 하지 마라."
단어가 하나하나 싾여갈 때마다 김 아무개의 눈가는 더 축축해졌고, 눈동자가 점점 심하게 떨림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아려오고 있다.
"왜... 왜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는데?"
퉁명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리는 김 아무개였지만 그것이 흔들리는 감정을 감추기 위한 것임은 누구라도 알 만했다.
"지금 흑호방주를 놔둔다면 네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넌 그자의 인간 개조 예술을 본 적이 없어. 네가 그런 꼴을 당하고 내가 저승에서도 죄책감에 몸부림치느니 오늘 흑호방주를 죽이고 그놈과 저승에서 영원히 서로 죽고 죽이더라도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식할 수 있어. 옛날부터 너를 위해서라면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 목숨이다. 내가 없더라도 요시노부 공이 너를 영원히 곁에 둔다 했으니 된 거 아니냐. 여자는 장성하면 남편을 따른다고 했다. 조금 빨라지는 것 뿐이니, 너는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m1902의 손잡이를 꽉 붙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 아무개를 놔두고 일어서서는 나를 외면하고 분노에 찬 눈으로 교실 바닥만 바라보는 요시노부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돌아서 교실 문을 열어젖히자, 교실 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대원을 시작으로 생각외로 많은 전습대원들이 복도에 있었다.
"다들 집에 안 가고 뭐하나? 최종 명령을 듣지 못했어?"
"전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다들 사연이 있는 대원들이었다. 방금 돌아갈 집이 없다고 한 자는 조씨 성을 가진 대원이었다. 그는 원래 포크레인 기사였다. 그러나 건설회사가 돈을 주지 못하고 부도나는 바람에 자비로 충당했던 기름값과 유압 호스 교체비용을 대지 못하고 빚만 남기고 파산했다. 재산을 보전하겠다고 마누라와 이혼했지만 별거 생활 도중 좀비사태가 벌어지고, 자식과 마누라는 결국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욕을 잃고 텅 빈 집들을 전전하며 무전취식하는 생활을 하다 전습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가족이 없으니 정의의 친구가 되기라도 해야겠습니다!"
비장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대머리 중년은 49살의 장씨 성을 가진 대원이었다. 그는 원래 경기도에서 알아주는 철근팀을 이끄는 오야지였다. 한창 때에는 현장을 12개나 돌릴 정도였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큰 공사를 벌이던 도중 좀비사태가 벌어졌고, 평생을 걸쳐 일구어 온 인맥, 회사들, 기술자들이 모조리 전멸하여 받아야 할 돈은 소멸해 버렸고 일을 줄 사람도 없었으며, 결국 거지가 되어버렸다. 마누라는 원곡동에서 식당 일을 하다가 취객의 폭력사태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아들은 신장 투석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적은 돈조차 끊기자 괴로워하면서 죽어갔다. 그런 지옥 속에서 복수심으로 미쳐다가시피하던 그에게 전습대가 주관하는 대민 무술교육은 커다란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전습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면서 극단적인 성격도 서서히 치유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전습대 없이는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고 그럼으로써 차라리 최후의 순간을 전습대와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저도 갑니다. 승조의 원수를 갚을 겁니다."
김석원도 3척 2촌의 노다치를 손에 들고 복도에 나와 있었다. 이러다간 분위기 때문에 다들 죽겠다고 나설 판이다.
"그만! 지금 가면 다 죽을 뿐이다. 나도 살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야. 대원과 간부들은 경거망동을 삼가라."
"전습대도 해체됐는데 뭘 이래라저래라야?"
시선이 집중된 곳은 36살의 깡패 출신 대원이었다. 이자는 전습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두들겨맞고 어쩌다가 전습대에 들어온 친구였는데, 어깨에 호랑이 문신이 있었다. 반항끼를 은근히 깔고 있던 터라 3소대장 이상평과 한판 뜨고 두번째로 얻어맞고서야 좀 조용해졌지만 활달한 성격은 그대로였다. 솔직히 나는 의외였다. 이자는 나이도 젋고 할 일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굳이 남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따라가고 싶은 것 뿐이니 상관 마십쇼~"
결국 내가 다른 간부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총참모를 비롯한 간부들은 들으라. 요시노부 공을 호위하여 안전 가옥에서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총재의 신변을 보호할 것. 이상!"
이것으로 이들은 임무가 생겼으니 특공의 순간에 한발 나서 참여하지 않은 비겁자라는 자괴감을 가지지 않을 구실이 주어진 것이다. 책상에 양손을 짚고 여전히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요시노부가 보였다.
"혹시 교전의 책임을 추궁하거든 봉행이 대원들을 선동하여 독단적으로 반기를 들고 빠져나갔다고 하십시오."
방향을 돌려 요시노부가 시선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는 한마디도 없이 바닥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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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대 84화 MUST DIE
언젠가 씁니다.
* 진보 슈리 - 1868년 무진전쟁 당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하고 오사카성에서 결전을 고려하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여 에도성으로 도망가게 주동했던 가신입니다. 요시노부의 항복을 주도하여 도쿠가와 가문 유지라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책임질 자가 필요하다는 신정부측의 요구로 개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할복했습니다.
"전습대란 단순히 친일 극우 자경단이 아닙니다. 이들은 현 정부의 거대한 음모의 첨병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만 것이죠. 뭐 뿌리부터가 친일 반민족인 이 정부입니다. 개의 자식은 개란 거라고나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진실이란 게 늘 그렇지만 충격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뒤이어 나오는 것은 김황식 총리가 원곡고 출장본영에 밤에 몰래 방문하는 것을 찍은 스틸샷이었다. 뒤이어 스틸샷뿐만 아니라 정부 고위관리들이 야심한 시각에 몰래 방문하는 CCTV영상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낱 지방 자경단 따위에 왜 고위급 인사들이 방문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희는 다행히도 마지막 양심을 버리지 않은 내부 고발자들 여러분 덕분에 더 추악한 음모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거짓말이야!! 정부 관리 같은 건 한명도 근처에도 온 적 없었어!!"
요시노부가 교실 바닥을 카타나 칼집 끝으로 내리치며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건 모두 조작이다. 출장본영에 드나드는 정부 요인은 한명도 없고 공무원으로 따지자면 김형사나 몇몇 공무원들이 연락 협의차 왔다갔다 했을 뿐, 제갈 진욱조차도 두번에 불과했을 뿐이다.
"왜 이런 상황에 안산시의 치안에 갑자기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며, 전습대라는 자들은 무슨 수로 총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걸 공인까지 받았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동북 일본인들을 한국에 받아들였으며, 왜 그것이 안산시의 좋은 주택들과 아파트가 밀집한 신시가지에서 이루어져야 했을까요? 왜 일본 자본의 투자가 그것과 동시에 이루어졌습니까? 왜 전습대는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을 탄압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았죠?"
그리고 뒤이어 예전 주공아파트에서 일가족이 단체로 추락하는 영상, 그리고 그 남편이 나에게 덤벼들다가 일본육군 발도술 4본 후적(後敵)에 의해 맞아죽는 영상이 나왔다. 그날 흑호방주 저놈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있다가 나를 보곤 오토바이로 도주한 날의 영상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퍼즐이 맞기 시작한 거죠. 정부는 좀비사태로 황폐화된 경기도,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지인 경기도를 제 2의 일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일본인들이 이주하고, 일본 자본이 투자하고, 일본인들이 기업을 세우고 경제를 차지하면... 그 다음은 정치죠. 이순신 장군과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나라를 이 정부는 일본에게 넘기려고 한 겁니다. 하층민과 싸이코패스가 인솔하는 앞잡이들을 이용해서 말이죠. 뭐, 남경대도살의 산실인 일본육사를 나오신 모 대통령님의 따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돌아보면 이제와서 놀랄 것이 있겠습니까?"
하며 미소짓는 흑호방주의 면상은 참으로 영원히 웃게 만들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뒤이어 그는 정부 내부 문건이라며 증거들을 계속해서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미 포털사이트들은 이 내용을 실시간으로 받아적는 기자들에 의해 도배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고 SNS는 폭발하고 있었으며, 정부를 저주하는 여론은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을 지경이었다. 증거를 하나 하나 공개한 흑호방주는 갑자기 정색하며 진지하게 카메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러분, 지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정부가 저를 비롯한 지사들을 유언비어 유포와 폭력사태 주범으로 체포하겠다고 한답니다. 하하하..."
흑호방주가 웃으며 주변인들을 돌아보자 다들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가벼운 웃음의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 흑호방주는 마치 유머러스한 토크쇼를 보는 듯한 여유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의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정의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강고한 권력의 성채, 부패한 앙시엥 레짐이 민중의 힘에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지 말입니다. 68년의 파도가 다시 한번 세상을 후려칠 것입니다. 지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니 정말 정의는 막을 수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러나 보면 웃음도 나오는군요. 다리 사이에 달린 그건 부랄입니까? 그게 달려있다면 달아놓은 값어치를 하시죠. 집에서 키보드로 분노해봐야 전기 신호만 조금 늘어날 뿐입니다. 부패 권세에 아무런 데미지를 못준단 말입니다. 키보드로 분노하지 마시고 거리로 나오십시오. 정부가 여러분의 몸을 지킬 도구까지 뺏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뿌리부터가 더러운 이 정부가 말입니다. 키보드 자판을 누르지 말고 키보드로 후려치세요. 검과 창을 장식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해 휘두르세요. 그건 폼잡을려고 산겁니까? 어려워 보입니까? 불가능하고 안될 것 같습니까? 4월 19일은 그럼 무슨 수로 이루어졌으며, 87년 6월은 어떻게 된 겁니까? 기억하십쇼. 민중이 막을 수 없는 정의를 보여줄 때 비로소 역사가 움직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거리로 나서십시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외국인이 이런 말 하게 만들지 말란 말입니다!!"
이게 대중집회였다면 폭풍과 같은 환호성이 이어졌을지도 모를 말빨이다.
"이제 저희는 시민 동지를 경찰과 전습대의 살인 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들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전습대에 단단히 경고합니다. 이미 권력의 개 사법부 따위의 허울 좋은 법놀이는 종잇장만한 권세도 잃었습니다. 절대적인 정의가 지배하는 역사의 법정은 매국노 전습대에 이미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니 전습대는 똑똑히 들으시죠. 지금이라도 명단을 바치고 우리 구국의 강철대오에 자수하고 시민 수호를 위해 봉사한다면 그나마 벌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민족을 고수한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알아서 처신하시죠."
씨익 웃는 흑호방주를 마지막으로 영상은 뉴스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사람을 해체하여 팔아먹는 인간쓰레기가 감히 주둥이를 나불대!?"
김석원의 분노에 찬 고성과 함께 누군가의 소유였을 책상 위의 모니터와 책들이 한꺼번에 쓸려 내던져졌다. 야스스케도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고 요시노부는 참담한 표정이었며 사부로 이상평은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김책 동지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린 듯 전신에서 피로와 자포자기의 기운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앞으로 흑호방주가 어떻게 판을 키울 것인지 궁금해졌다.
"허무도, 전직 운동권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
"이제... 일단 사람이 모이는 게 중요하니까 사람 모이기 좋은 광장이나 지역에 먼저 선발대가 나가있을 겁니다. 그리고 SNS를 이용해 참여를 선동하고, 친구들 아는 대로 다 불러모을 겁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참여하라고 소리치겠죠. 그러면 마지막 망설임도 끊어집니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원하는 지역으로 대중을 유도해서 규모를 크게 키울 겁니다. 그러면 곳곳에 분산된 끄나풀들이 수뇌부의 지령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관공서, 경찰서 뭐 원하는 대로 이동하는 거죠. 그러면 충돌이 생길 겁니다. 그러면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이나 크게 다친 사람들을 병원으로 옯깁니다. 그런데 반드시 사람들을 통과해서 많이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만일 관공서 건물이 한곳이라도 함락되면, 더 커질 겁니다. 그러면 전국적인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거죠."
"...진압은 가능하겠지?"
요시노부의 질문이다.
"어떤 시민폭동도 군대를 이길 순 없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도 결국은 진압당했습니다. 지금은 더 쉽겠죠. 하지만 이 정부에 그만한 배짱이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배짱이 있다면 곧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출동할 겁니다."
요시노부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지만 저들이 아무리 우리를 잡는다고 말해도, 이미 모든 문서와 자료는 완전 파기되었다. 대원들이 전습대 티를 내지만 않는다면 안전할거야. 곧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니 우리는 며칠만 버티면 돼. 내가 매입해서 개조한 안전 가옥이 몇군데 있다. 다들 그곳으로 피난하고 조금만 버티면 된다."
요시노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일어섰다.
"다들 지금 바로 출발하자. 관용차량과 개인 차량을 이용하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저는 안 갑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흑호방주가 지금 저기 있는 이상 제가 그를 놔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요시노부의 표정이 급히 일그러졌다.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듣자하니 흑호방주의 주변에는 녹두대가 포진하고 있다고 하고 언제든지 깡패들도 증원될 수 있다. 모르진 않겠지. 죽으러 가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아직도 몸에 열세자루의 칼을 꽂고 미나토가와의 마사시게처럼 죽겠다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느냐는 말이다!!"
"됐습니다.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나 흑호방주는 반드시 죽여야만 합니다. 그는 혼자서 전국의 진보세력을 규합하였고 전습대를 파멸시켰으며 정부조차 위기에 몰아넣은 자입니다. 단 한명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명단 없다고 전습대원과 그의 가족, 간부들과 친지들을 못 찾아내겠습니까? 설사 우리가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숨어서 산다고 한들 저자의 집요한 추적과 보복에 노출되지 말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럼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더 큰 후회와 고통 속에서 종국에는 그자의 인체 개조 예술의 재료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너는 왜 항상 한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나, 그는 이미 수배령이 내려진 자야. 계엄군과 경찰이 철저하게 수색하고 체포할 것이니 걱정 말고 지금은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라. 저 아이(김아무개)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죽겠다는 것인가? 애초에 사람 몇명이 합류한다 한들 수백명 이상의 세력을 어찌 이기겠는가? 이미 전습대는 해체되었고 대원들은 없다!"
"안되면 사흘이라도 숨어있다가 야습이라도 하겠습니다. 흑호방주는 원래 신분 이름 없이 살아가던 자, 계엄군은 물론 경찰조차도 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분이야 위조하면 그만이고 얼굴이야 갈아치우면 그만인 자죠. 영원히 어둠 속에 숨어버리면 앞으로 슬픔에 분노하고 증오에 미친다 한들 절대로 그를 찾아내기는 커녕 얼굴 한번 볼 수 없게 될 겁니다. 더군다나 그만한 조직력을 가진 자라면 앞으로 동북 일본인들을 참담한 처지로 몰아넣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동북인들의 대부시라면 더더욱 저를 놔두셔야 합니다."
요시노부의 표정은 점점 비참해져가고 있었다.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젠 총알은 커녕 사람도 없어. 우리 모두가 다 간다 한들 개죽음 뿐이다. 더군다나 너는 나의 첫 가신이다. 첫 가신을 이렇게 보낸다면 동북인들에게 무슨 염치로 도쿠가와의 이름을 내세운단 말인가!"
책상을 내려치는 요시노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가신이라...
"진보 슈리의 일이라도 생각이 나셨습니까, 과거에 연연하는 자는 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서 나가려고 하는데 발소리가 하나 더 울렸다. 뒤를 보니 성난 얼굴에 눈가는 젖어있는 김 아무개이다.
"나도 따라갈거야!"
나를 올려다 보는 김 아무개를 보니 그녀와 함께했던 몇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다.
"너와 같이 살게 된 건 처음엔 해프닝에 가까웠었지... 누군가는 짐을 떠맡았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고... 사람들은 내가 너를 돌봐준다고 말한다지만 그렇지 않아. 황량해진 집안에서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전부였던 나날과 비교하면 네가 화를 내도 나는 활기를 찾을 수 있었고 가끔씩 보여주는 미소에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어. 그러면서 점점 집에 오는 게 즐거워졌어. 네가 있었기에 나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었어. 나는 너에게 구원받은 거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점점 너를 위하여 삶을 다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네가 알아주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어. 내가 그러고 싶었으니까.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것도 그것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죽는다면 나는 심장이 찢어지다 못해 저승에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으로 스스로 내려가게 될거야. 그러니... 따라온다는 말은 하지 마라."
단어가 하나하나 싾여갈 때마다 김 아무개의 눈가는 더 축축해졌고, 눈동자가 점점 심하게 떨림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아려오고 있다.
"왜... 왜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는데?"
퉁명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리는 김 아무개였지만 그것이 흔들리는 감정을 감추기 위한 것임은 누구라도 알 만했다.
"지금 흑호방주를 놔둔다면 네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넌 그자의 인간 개조 예술을 본 적이 없어. 네가 그런 꼴을 당하고 내가 저승에서도 죄책감에 몸부림치느니 오늘 흑호방주를 죽이고 그놈과 저승에서 영원히 서로 죽고 죽이더라도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식할 수 있어. 옛날부터 너를 위해서라면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 목숨이다. 내가 없더라도 요시노부 공이 너를 영원히 곁에 둔다 했으니 된 거 아니냐. 여자는 장성하면 남편을 따른다고 했다. 조금 빨라지는 것 뿐이니, 너는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m1902의 손잡이를 꽉 붙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 아무개를 놔두고 일어서서는 나를 외면하고 분노에 찬 눈으로 교실 바닥만 바라보는 요시노부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돌아서 교실 문을 열어젖히자, 교실 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대원을 시작으로 생각외로 많은 전습대원들이 복도에 있었다.
"다들 집에 안 가고 뭐하나? 최종 명령을 듣지 못했어?"
"전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다들 사연이 있는 대원들이었다. 방금 돌아갈 집이 없다고 한 자는 조씨 성을 가진 대원이었다. 그는 원래 포크레인 기사였다. 그러나 건설회사가 돈을 주지 못하고 부도나는 바람에 자비로 충당했던 기름값과 유압 호스 교체비용을 대지 못하고 빚만 남기고 파산했다. 재산을 보전하겠다고 마누라와 이혼했지만 별거 생활 도중 좀비사태가 벌어지고, 자식과 마누라는 결국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욕을 잃고 텅 빈 집들을 전전하며 무전취식하는 생활을 하다 전습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가족이 없으니 정의의 친구가 되기라도 해야겠습니다!"
비장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대머리 중년은 49살의 장씨 성을 가진 대원이었다. 그는 원래 경기도에서 알아주는 철근팀을 이끄는 오야지였다. 한창 때에는 현장을 12개나 돌릴 정도였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큰 공사를 벌이던 도중 좀비사태가 벌어졌고, 평생을 걸쳐 일구어 온 인맥, 회사들, 기술자들이 모조리 전멸하여 받아야 할 돈은 소멸해 버렸고 일을 줄 사람도 없었으며, 결국 거지가 되어버렸다. 마누라는 원곡동에서 식당 일을 하다가 취객의 폭력사태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아들은 신장 투석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적은 돈조차 끊기자 괴로워하면서 죽어갔다. 그런 지옥 속에서 복수심으로 미쳐다가시피하던 그에게 전습대가 주관하는 대민 무술교육은 커다란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전습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면서 극단적인 성격도 서서히 치유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전습대 없이는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고 그럼으로써 차라리 최후의 순간을 전습대와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저도 갑니다. 승조의 원수를 갚을 겁니다."
김석원도 3척 2촌의 노다치를 손에 들고 복도에 나와 있었다. 이러다간 분위기 때문에 다들 죽겠다고 나설 판이다.
"그만! 지금 가면 다 죽을 뿐이다. 나도 살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야. 대원과 간부들은 경거망동을 삼가라."
"전습대도 해체됐는데 뭘 이래라저래라야?"
시선이 집중된 곳은 36살의 깡패 출신 대원이었다. 이자는 전습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두들겨맞고 어쩌다가 전습대에 들어온 친구였는데, 어깨에 호랑이 문신이 있었다. 반항끼를 은근히 깔고 있던 터라 3소대장 이상평과 한판 뜨고 두번째로 얻어맞고서야 좀 조용해졌지만 활달한 성격은 그대로였다. 솔직히 나는 의외였다. 이자는 나이도 젋고 할 일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굳이 남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따라가고 싶은 것 뿐이니 상관 마십쇼~"
결국 내가 다른 간부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총참모를 비롯한 간부들은 들으라. 요시노부 공을 호위하여 안전 가옥에서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총재의 신변을 보호할 것. 이상!"
이것으로 이들은 임무가 생겼으니 특공의 순간에 한발 나서 참여하지 않은 비겁자라는 자괴감을 가지지 않을 구실이 주어진 것이다. 책상에 양손을 짚고 여전히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요시노부가 보였다.
"혹시 교전의 책임을 추궁하거든 봉행이 대원들을 선동하여 독단적으로 반기를 들고 빠져나갔다고 하십시오."
방향을 돌려 요시노부가 시선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는 한마디도 없이 바닥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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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대 84화 MUST DIE
언젠가 씁니다.
* 진보 슈리 - 1868년 무진전쟁 당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하고 오사카성에서 결전을 고려하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여 에도성으로 도망가게 주동했던 가신입니다. 요시노부의 항복을 주도하여 도쿠가와 가문 유지라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책임질 자가 필요하다는 신정부측의 요구로 개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할복했습니다.




덧글
그리고 정부를 상대로 이만큼이나 도전을 했으니 흑호방주 목을 따더라도 실체만 확인시키면
그 죄를 크게 묻지 않을 가능성도 작게나마 기대해 볼 만할 것이고, 또 어떻게 잘 엮으면
전습대에 대한 처벌도 좀 좋은쪽으로 흘러가게 될 수 있으려나..
여튼 당장은 우리의 상남자들이 어떻게 작전을 성공시킬지가 관건이네요.
그런데 조금이나마 썸타는것 같던 김추자의 반응이 없네요. 게대지는 죽어도 그만이라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