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수호역 전습대의 행차시다 이 좇만이들아!"
자물통이 절단기로 박살나고 오래된 콘크리트 벽돌 공장의 낡은 철문을 열어제끼면서 내가 선두로 들어가면서 외치자,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의외로 여기는 올 거라 생각을 안 한건지는 몰라도 경호대 같은 건 없다시피했고 공장도 조용했다. 겉에서 보기엔 불도 안 켜져 있는 듯 했는데 역시 이것들 창문에 시트지를 몇겹으로 발라놓은게 틀림없었다. 철제 쪽문을 열어제끼니 안은 아주 환하지 않은가? 역시 동태를 살피네 마네 하지 않고 대놓고 철문부터 버스로 들이받고 초 스피드로 전개하기 잘했다.
큰 소리를 치면서 성큼성큼 걸어가자 안쪽에서 왠 놈이 손에 정글도를 들고 튀어나왔으나, 곧 왼손에 든 콜트 네이비 리볼버의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억울하면 니들도 총 사던가. 곧 75cm의 짧은 날길이로 실내전에 친절한 해군 타치와 함께 쓰이는지도 모를 낡은 신발장들이 위치한 좁은 통로를 지나 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달려들자 넓은 공간이 튀어나왔다. 역시 자주 쓰이는 곳인지 판넬로 구성된 벽면과 바닥이나 천장 할 것 없이 깨끗했다. 사람들이 관리하는 가동중인 공장이라는 증거다.
넓다고 생각한 공간은 사실 그렇게 넓지는 않았고, 판넬로 막힌 벽체에는 문이 있었는데 창문 너머로 공기를 고압으로 불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에어 샤워가 보였다. 즉 이곳은 과거 반도체나 LCD생산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는 말이다. 피쳐폰 시절만 하더라도 공단에서 LCD같은 제품 생산이 주요한 대세였지만 스마트폰 시장이 활성화된 이후로 그런 곳들은 주로 F-PCB로 대체되거나 그냥 망하거나 했고, 또 좀비사태가 직격타로 몰아친 탓의 이곳의 수많은 공장들이 하다못해 최소한의 관리라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어버렸다. 이곳도 아마 그런 공장 중 하나였을 텐데, 설비 전환도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뭔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곧 전습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면서 내 옆을 달려 지나갔다. 대원들 몇몇은 판넬로 구성된 벽면을 따라 다른 통로로 들어갔고, 곧 욕설과 함께 누군가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련의 대원들은 빠루를 들고는 에어샤워룸의 문 손잡이를 두어번 돌려보더니 잠긴 걸 확인하고는 빠루를 문 틈새에 끼워서는 제껴 버렸다. 스텐레스 문이 금세 뜯기면서 열려버렸고 에어샤워가 작동하기도 전에 반대쪽 문을 홱 열어버렸기 때문에 대원들이 고압의 바람을 맞고 옷깃이 휘날리고 눈을 못뜬다던가 하는 꼴불견은 피할 수 있었다.
대원들이 문을 발로 차서 열고 또 어떤 놈이 재수없게 대원의 칼에 맞으면서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상황이 벌어지는 등 시끌시끌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내 생각보다도 오히려 저항이 없고 생각처럼 시끄럽지도 않았다. 이 공장은 3층짜리였고 대원들이 이미 2층까지 달려들었으므로 나는 계단을 두세걸음씩 뛰쳐올라가면서 3층으로 곧바로 향했는데, 3층 복도 끝에는 아이솔판넬로 만들어진 작은 문에 플라스틱 창이 사각형으로 나 있었고 그 창은 불투명했지만 하얗게 빛나고 있는 걸로 보아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곳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려고 뛰기 시작하자 방금 지나친 문이 홱 열리면서 오파운드 곡괭이 자루가 바닥을 강하게 강타했다. 나를 치려고 했는데 달려서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었다. 인상을 잔뜩 쓴 마른 얼굴의 양아치 같은 녀석이 나를 못 친걸 알았는지 몽둥이를 들어올리면서 달려들려고 했으나 곧 다리가 꼬이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콜트 네이비 참 좋은데.. 어떻게 탄피식으로 개조할 방도가 없네..
뒤에서 중국어, 왠지 욕설로 추정되는 큰 소리가 들리길래 뒤로 크게 빠지면서 몸통을 뒤로 크게 기울이자 거의 코끝에 닿을 정도로 몽둥이가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곡괭이 자루다. 이건 타격력은 좋지만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서 진짜로 세게 휘두르면 중간에 궤도를 바꾼다거나 하는 것 자체가 안된다. 그만큼 위력은 좋다만.. 그래서 잘못된 무기를 선택한 죄로 콜트 네이비 리볼버의 납 탄두의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덩치 큰 놈이 입 안으로 들어간 총탄에 의해 피를 울컥울컥 뿜어내면서 쓰러지자 그 뒤에는 이젠 묘사하기도 지긋지긋한, 사시미를 청테이프로 걸레자루에 고정시킨 급조 창을 들고 달려드는 놈이 보였다. 놈의 기세가 대단했으므로 조준할 시간도 없이 몸통에 대고 총격을 가했으나 엉뚱하게도 팔뚝에 맞아 왼손은 창을 놓쳤으나 오른손은 그대로 잡고 있었다. 팔뚝이 총에 맞자 다리를 오므리며 잠깐 위축되며 얼굴을 찡그렸으나 분노로 덮어버리는 듯 오른손을 길게 뻗어서 나를 찌르려고 시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명치에 맞은 총탄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달려오던 관성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시 일어서려고 시도하는 놈의 등짝을 밟고 지나가면서 머리통에 총을 한방 쏴주고서는 복도 끝의 문을 발로 뻥 까자, 물론 안들어갔기 때문에 왠 일본도가 허공을 가르며 칼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습격할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원래 상식을 거부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게 될 리가 없다. 곧 덩치는 평범했지만 운동은 좀 해본 거 같은 탄탄한 체구의 놈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내가 뒤로 물러나자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칼을 높이 쳐들고는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허망하게 막혔다. 권총과 해군 타치를 X자로 교차해서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쌍검을 쓰는 곳이라면 다들 하는데 구태여 가토리신토류의 양도(兩刀)나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천일류, 원명류를 예로 들 것도 없이 태국의 쌍검술이나 르네상스 유럽검술에서도 다 하는 방식이다. 이놈은 내가 왼손에는 권총을 들었고 오른손 한손만으로 칼을 잡았으니까 강하게 치면 오른손만으로는 칼을 받아낼 힘이 안나올테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게 세상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놈이 당황하는 듯 했으나 그때는 이미 다음 단계로 이행했기 때문에 이미 늦었다. 이 X자로 교차해서 막는 것은 받아내는 힘도 강하지만 무엇보다 상대의 칼을 묶어둔 채로 한쪽의 칼을 떼어서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 강력하다. 하나를 떼어네도 칼 하나는 놈의 칼과 접촉하고 있는 상태이니까 당장 나를 베거나 찌를 수가 없다. 권총으로 베거나 찌를 수는 없으니까 해군 타치를 떼어내어 칼날을 옆으로 눕혀 놈의 가슴을 찔렀다. 물론 장검을 떼는 순간 놈의 칼이 권총의 총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지만 방아쇠울에 걸렸으니 뭘 할 도리가 없었다. 다음 공격을 하려고 생각했겠지만 그때는 이미 눕혀진 타치의 칼날이 갈빗대 사이로 폐를 앞뒤로 관통하여 기흉의 징벌을 내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놈이 쓰러지면서 칼이 자연스럽게 빠졌고, 입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숨을 쉬는 기적에 옆으로 누워 괴로워하는 놈 뒤로... 어이구.. 낡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간지나게 앉은 저 광대뼈 툭 튀어나온 미역머리는 누구신가? 그놈은 딱히 분노도 아니고 겁먹은것도 아니고 뭔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듯 했다. 권총을 겨누며 조용히 말했다.
"머리에 바람 구멍이 날래 아니면 머리를 땅에 박을래?"
"나라면 다리부터 쏘고 봤을 텐데. 지금 그러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거든."
담담하게, 하지만 비웃음이 5%정도 함유된 말투로 말하는 놈의 표정은 여유가 사라지지 않는다. 쓰바... 그도 그럴 것이 돌파하면서 콜트 네이비의 6발을 다 써버렸거든.. 내 총이 리볼버라는 걸 본 놈의 계산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장전하기도 뭐한게 이건 화약과 탄두와 뇌관을 따로따로 결합하고 총열 밑의 밀대로 일일이 밀어넣어줘야 하는 1850년대에 출시된 그런 물건이란 말이지.
놈은 마른 얼굴에 미역머리, 그리고 로만 칼라의 검은색 옷에 단추도 검은색이고 외투도 검은색의 올 블랙 가이였다. 옆에는 노트북 가방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었다. 아마 저기에 이놈의 모든 사무 자료가 들어있을 것이고, 수사에서 저거보다 결정적인 자료는 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총알이 있었더라도 이놈이 아마 보스인 모양인데, 이놈을 죽이면 중요한 정보나 하다못해 기소거리가 사라지는 셈이니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아니 뭐 딱 봐서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짐작할 만 했다. 뭐 지금까지 보스전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결국 극한상황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은 허둥대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소에 침착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난리가 생기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완전히 평상심 그대로이며, 냉정하다. 확실하게 보통 놈이 아니다. 놈과의 대치가 10초 정도 지났을까, 나는 씨익 웃으며 왼손에 들고 있던 콜트 네이비 리볼버를 오른쪽 허리의 홀스터로 집어넣었다. 놈은 의외라는 듯한 눈을 하더니 곧 납득하는 듯 했다. 어차피 놈이 칼을 가져서 X자로 막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만일 엉뚱한 짓을 한다면 이 타치는 한손으로 쓰기에는 위력이 대단치 않아 상대를 단번에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총알이 없는 총은 그냥 넣어두고 양손을 다 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게 합리적이다.
그리고 칼을 양손으로 잡았지만 칼끝도 놈을 겨누지 않는다. 중단 오래 취하면 힘들고 근육이 경직되어서 빠른 대응에 오히려 좋지 않다. 그 대신 오른발을 앞으로 하고 칼끝은 비스듬하게 오른쪽 땅을 향하는 이른바 <강철의 열린 문> 자세를 취했다. 열린 문이란 칼끝이 상대를 향하지 않으므로 상대가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열려있다는 것이고, 닫혀있다는 개념은 상대를 겨누어 견제하여 상대가 못 들어오니까 닫혀있다는 것이다. 열린 강철문은 일본에서 말하는 오토나시노 카마에(소리없는 자세)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무튼 손을 쉬게 해주고 언제든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한 것이다.
이놈이 어떤 서프라이즈를 숨기고 있을 지 모르므로 일단은 이렇게 대치하기로 했다. 수색이 끝나면 곧 3층으로 대원들이 올라올 것이므로 그때 처리하는 게 더 안전하다. 말도 안 하고 있는 편이 대치하는 데에는 낫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말을 자제할 수 없었다.
"문영화라는 여자를 아나?"
"문영화? 글쎄..."
놈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잠시 생각해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고개를 짧게 흔들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녀는 실종되었어. 너희들에게 납치되었지."
"우리가 했다는 증거 있나? 주변부터 더 잘 찾아봤어야지."
그러다 갑자기 짧게 한숨을 쉬더니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툭툭 치면서 고개를 삐닥하게 하고는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는 고기썰때 칼질 몇번했는지 일일이 다 기억하나? 우리가 납품하는 제품이 한두개도 아니고 어떻게 이름을 다 기억해?"
답이 없다는 투로 왼손을 이마에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꼴이 진짜 이놈은 아포칼립토 산제물로 바쳐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둣발 소리인 것으로 보아 전습대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바깥에서 자동차 클락션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회장님 의자의 팔걸이를 잡더니 의자를 나를 향해서 밀어버렸다. 이새끼 도망간다!
칼을 들어올리며 의자를 발로 차서 옆으로 넘어트리며 달려들려는 순간 놈이 뭔가 하얀 가루를 홱 뿌려버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하지만 눈에 약간 가루가 들어갔고 곧 눈에 장난 아닌 쓰라림이 느껴졌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나오면서 정신 못차리는 와중 옆에 괜찮냐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김석원이다.
다행히 소량 들어갔던 듯 몇번 닦아내자 대충 앞을 볼 수 있게는 되었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활짝 열린 창틀을 밟고 앉아 오른손으로는 벽을 잡고 왼손으로 노트북 가방을 든 녀석의 모습이었다. 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희에게 잘못은 없다! 소방법을 탓하라구!"
이 공장은 천장이 높기 때문에 말이 3층이지 일반 아파트 건물 4~5층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뛰어내린다? 니미 놈의 창문 옆에 보이는 것은 완강기였다. 소방법 개새끼!
김석원과 내가 칼을 겨누며 창문을 향해 달려들면서 일제히 찔러버렸지만 이미 녀석은 어둠 하늘 속에서 드문드문 펼쳐진 조명들을 배경 삼아 떠 있었다. 인사하듯이 오른손을 쭉 펴고 선 채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놈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곧 놈은 공장 벽 바깥으로 안전하게 착지했고 김석원이 급히 홀스터에서 허둥지둥하며 콜트 네이비를 뽑아 몇차례 사격했지만 어둠 속에서 초고속으로 튀어나가는 두대의 오토바이에는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오토바이들은 큰 도로로 나가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급가속을 시작했다. 놓친 것이다. 허탈했다.
"그자는...."
"흑호방의 두목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말 보통 놈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제일 큰 위협이 될 것 같군요."
김석원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자는 절대 경찰에 넘기지 말고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하길래, 뭔가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말하기를
"직접 보시지요."
1층에 내려와 크린룸으로 들어가 보니 김형사와 경찰들이 심각한 얼굴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나 김석원의 반응의 이유를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까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스텐레스 프레임에 볼트로 몸통이 고정된, 사지절단된 여자 여섯명이 머리통 뚜껑이 따인 채로 뇌에 전극이 박힌 상태로 정기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묘사는 일단 자제해둔다. 그런 과학적 지옥도 속에서도 스스로 한가지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문영화의 모습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씹쌔끼들.. 형사생활 수십년만에 나를 빡치게 만드네..."
그런 김형사가 내린 명령은 아까 우리를 습격했던 그 폭도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대령하라는 것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했는데, 열받은 전습대원들과 김석원 등 소대장들이 놈들을 추적한 다음 대부분 쏴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14놈 정도가 붙들려 왔는데 이놈들은 모두 전신에 피멍이 들고 뼈가 부러지거나 턱이 이탈된 자가 7명이었으며 귀에 칼을 맞고 반쯤 잘린 자가 1명이었다는 점만 말해둔다.
사기꾼 관장이 이끄는 꼰대 관원들의 자뻑 집단인 정무림은 폭발 사고에 직빵으로 걸린 탓에 관원들의 반 정도가 죽거나 다쳤고, 주변에 도뙈기시장처럼 주차해놓았던 관원들의 차량은 파편에 본넷이 뚫리거나 앞유리가 깨졌고, 하다못해 기스라도 나지 않은 차가 없어 며칠간은 카센타가 호황을 누리는 때아닌 행운을 맞았다. 사기꾼 관장의 멱살을 잡는 가족들도 있었다곤 하나, 자기들이 좋아서 자율방범대에 가입하고 활동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고 한다.
문제의 공장은 경찰의 말에 의하면 이미 설비들을 철수시키고 이사를 사실상 끝마친 시점에서 최종적으로 철수만 앞두고 있던 순간에 우리가 기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납치되어 과학적 지옥도의 도구가 된 여자들은 아마 김형사의 감이 가리키는 바로는, 이전에 팔다리로 만든 인간문자 FUCK YOU처럼 경찰을 농락하기 위한 작은 서프라이즈로 준비해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 싸가지없는 광대뼈 미역머리 놈의 머릿속에는 아무래도 클라이브 바커가 사는 모양이다.
이 일로 가장 덕을 본 것은 다름아닌 야망의 경찰서장 제갈 진욱이었다. 그놈은 상층부에 이 잔혹무도한 인신&장기 세트매매에 경찰을 조롱하는 인간 문자/인간 토르소의 사악함을 성토하였고 덕분에 인원의 확충을 확실히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원이 하루만에 불쑥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서, 곧이어 실시된 반월공단 전 공장에 대한 일대일 수색 점검에는 사기꾼 관장의 패거리와 우리 전습대원들이 대량으로 동원되었고, 한마디로 뺑이를 쳤다.
그대신 성과가 없는 건 아니라서, 버려진 공장 건물에 살림살이를 차리고 사는 사람이라던가, 과거 항적방의 것으로 보이는 무기들이 다량 숨겨진 곳을 찾아내는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 혹시나 기대했던 청웅 사타부언의 새로운 증거나 현장은 따로 나타나진 않았다. 결국 그 공장 2개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황산테러를 당했던 할머니는 결국 실명했고, 얼굴 피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복수의 기회를 달라고 하던 그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나는 그때까지 안 죽고 살아있던 흑호방의 간부 한 놈을 제공했는데, 그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내 알 바도 아니고 알 생각도 없다.
그리고 결국 문영화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신원이나 행방도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굳이 예상해보자면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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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다가 멈춰선 나를 돌아본 문영화가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면서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으며, 피부는 고운 편이다. 뒤에서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고,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콘크리트로 대충 포장된 산책로에서 서너 걸음 앞선 채로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뒤로 콘크리트 기단부가 이어져 있었고 그 위로 나무들이 푸른 잎을 자랑하며 우거져 있다.
내가 가만히 있자 나를 향해 다시 걸어오면서 그녀가 내 팔을 잡고는 팔짱을 끼었다. 그녀의 촉감과 모습과 머릿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행복이 밀려들었다. 다시 그녀와 함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넌... 내 아내지?"
"그럼~ 맞지!"
그러면서 그녀가 팔을 뻗어 손가락을 펴 보였다. 거기에는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러면서 내 팔을 잡고는 들어 보인다. 내 손가락에도 그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파고든 햇빛이 반지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녀는 팔을 내리고 다시 함께 걸었다.
살짝 더운 바람은 초여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기는 맑았고.. 그리고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 학교 수업 종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소리였지만 내가 중학교때 들었던 그 종소리였다.
"저거 뭐야.. 까투리?"
산책로 정중앙에 서 있던 까투리 한마리를 보고는 팔짱을 풀고 달려나가는 그녀를 보았다. 블라우스에 롱스커트 차림의 그녀는 수수했지만 아름다웠다. 나는 폴라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역시 수수한 옷차림이다. 까투리가 날아가 버려서 시무룩해서 돌아온 그녀를 보듬어 주면서 다시 한참 걸었다.
그리고는 아래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돌아보았다. 옛날 차인 대우 에스페로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 에스페로가 달릴 리가 없잖아...
그걸 무시해야 했지만, 괴롭게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돌아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아도 못 본 척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차라리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 전부 한순간 긴 꿈이었을 뿐이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세상과 내 앞에 있는 그녀가 현실이기를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발 그러기를 바랬을 것이다.
"넌... 어떻게 죽은 거야?"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뭐야.. 또 뭔 소리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으로 만들어진 등산로에 줄을 지어 지나가는 개미들의 대열이 있었고, 누군가 버린 담배 꽁초와, 누렇게 변한 솔잎들과, 약간의 모래들이 드문드문 비추어지는 태양빛에 그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약간 느껴질 듯한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지자, 그 빛들도 함께 흔들렸다. 나무가지들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기 때문이리라.
"넌 옛날부터 가끔씩 이상한 말을 했어..."
말끝을 흐리며 조금씩 울적해지는 듯이 톤이 내려가는 그녀의 말이었지만.. 곧 다시 하이톤이 되면서 생기 발랄한 어조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점도 좋아."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나뭇가지들 사이에 달린 잎들이 태양빛을 가려 그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눈부셨지만 그 빛을 피하지 않았다. 피부에 느껴지는 빛의 따사로움과 함께 피부를 타고 흘러가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점점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었는지 애매해져가는 것을 느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던 몸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군벌의 지도자였다던가 허리에 칼을 차고 갱들과 싸우고 순찰을 다녔다던가... 그런 일들이 있긴 했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세상은 지금보다는 좋지는 않았었지..."
다시 그녀를 보니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살짝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5분을 있었지만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사람의 인기척도, 자동차의 엔진 소리나 그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대로... 너와 둘이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있는 것만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긴..."
가슴께에 뜨거운 감촉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는 했지만 더 이상 입을 열였다가는 모두 잃어버릴 것만 같아 감히 그 이상 뭔가 말할 수는 없었다.
얼굴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고, 곧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에 축축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괴로워..."
나즈막히 한마디 하자. 그녀도 내 셔츠를 강하게 쥐었지만 곧 손을 느슨하게 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점점 더 회색이 되어 가고 있었고 개미떼들은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푸른 잎들과 태양빛은 점점 수십년 된 사진처럼 바래가고 있었다. 하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빛의 따사로움 만큼은 여전했다. 세상은 점점 흑백이 되어가고 있었는데도.
그녀가 얼굴을 떼지 않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리고 세상은 건물과 나무와 산과 하늘이 차례로 사라졌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이윽고 땅에 이어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 곧 나의 모습도 사라졌다. 완전한 암흑이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어디에 떠 있는지도 모를 나룻배를 타고 대나무 자루에 끈을 달은 조잡한 낚싯대를 드리운 영감 한명이었다. 한참 앉아 있던 그 영감은 이윽고 침묵을 깨고 한 마디를 던졌다.
"Quid est veritas?"(진리가 무엇이냐?)
나는 라틴어는 몰랐지만 그 말은 자주 들어봤으므로 곧 대답했다.
"노인장은 로마 인도 아니면서 무슨 라틴어를 쓰려고 하십니까?"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노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
다시 침묵했다. 노인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도 모르는 긴 시간 동안 낚싯대만 드리우고 있었다.
문득 그녀를 생각해낸 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바닥이 있는지도 모를 암흑 속에서 잔잔한 물에 파문이 일어나듯 눈물이 떨어져 수면이 흔들렸다. 암흑 속에서 그 눈물과 흔들리는 수면만이 빛이 있었다.
"그런데 네가 끌어들인다. 그녀를.."
뒤를 돌아 나를 본 노인네의 눈에는 검은 구멍만 있었고, 입술 사이에 눈알이 있었다.
"너는 죄가 많다."
이상한 모습에 놀란 나를 보던 노인의 눈꺼풀이 입처럼 움직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괴물처럼 보이느냐?"
"아무도 그런 모습을 보고 아니라곤 못할 겁니다."
"그것은 너의 모습이다."
눈을 깜빡이자 노인네의 얼굴은 인자한 보통 산신령 비슷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씨익 웃더니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짓고는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다시 눈을 깜빡이자 초가집 안에서 책상을 두고 그 노인과 내가 마주앉아 있었다.
"내가 뭘로 보이느냐?"
"조선시대 마을 영감님 같습니다."
노인네가 이빨을 드러내며 깊은 주름을 보이며 웃었다.
"그건 네가 보고 싶은 모습이다."
그리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쓴웃음에 가까운 그 얼굴에는 나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해야 할 그런 표정이 있었다.
"나가서 다 이루거라."
문을 열고 나가자 풀 하나 없는 황량한, 붉은색의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평원에 바위산만이 드문드문 있는, 붉은 하늘이 펼쳐진 세상이 있었다. 태양은 아주 작았으며... 구름은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태양 저편은 붉은 색이고 내 위로는 매우 옅은 하늘색의 하늘이다. 황량한 사막 같은 땅에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저편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누군가 싾은 듯한 돌무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돌무더기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뒷짐을 지고는 발로 괜히 자갈을 툭툭 찼다. 그러기를 한참이다.
나는 전습대 제복에 해군 타치를 찬 차림이었다. 모자는 없었다. 습기 없는 황량한 화성의 사막바람이 불어 내 프록 코트 자락을 휘날렸다. 손을 들어 바람을 느껴보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모았다가 펴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개울 건너편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죽은 거냐... 아니면 살은 거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한참 쓴웃음을 짓더니 눈을 감고는 말했다.
"살아서는 이 개울을 건너올 수 없어."
"그럼, 죽은 거구나..."
다시 한참 서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내가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옯겼다. 그녀가 그것을 보고는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구두가 개울의 물에 닿자 그녀가 돌을 집어서 내 발밑으로 던졌다. 툭 소리를 내면서 내 구둣발에 맞아 튕겨나간 돌은 서너번 구르다가 멈췄다. 그녀가 뭘 말하려는 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개울가에 반쯤 담궜던 구두를 다시 떼어 땅을 밟았다. 두어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그녀가 던진 돌을 주워 오른손에 쥐었다. 돌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괴로웠다.
그녀에 대한 미련만큼 돌을 쥐고 있던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제는 체념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 옆의 돌무더기를 향해 다시 던졌다. 붉은색의 돌이 돌무더기 꼭대기 근처에 떨어졌다가 다시 굴러서 밑으로 내려갔다.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너를 신부로 맞이하겠어."
"그 말, 벌써 780번째인 건 알아?"
발랄한 어투로 말하는 그녀였지만 이미 평온한 표정 속에서 눈물이 흐른 지는 오래되었다.
"781번째는 없는 줄만 알아둬."
"그 말도... 벌써 780번째야...."
더이상 둘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을 조금이라도 열면 주저앉아서 통곡할 것만 같았다. 그저 눈을 감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하염없이 서 있는 것 이외에 뭘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두어 걸음 옯기고는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가늘게 떠는 그녀가 있었다.
다시 두어 걸음 걷고 두번째로 돌아보았을 때,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눈물을 본 듯 했다.
세번째로 돌아보았을 때에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번째로 돌아보았을 때, 개울조차도 사라져 있었고, 노인네와 초가집도 없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서 있던 곳을 향해 그저 하염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작은 태양이 점점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했고, 생각보다는 빠르게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곧 하늘에 그 수를 셀 방법조차 없을 만큼의 별들이 반짝였고, 생전 눈으로 본 적도 없던 은하수라는 것이 하늘 위로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별들과 성운과 은하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고, 곧 하늘과 땅도 어둠에 잠기듯이 천천히 사라졌다. 암흑 속에 오직 나 혼자만이 서 있었다. 땅이 어딘지도 몰랐으니 서 있는다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으니 돌아선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서서 고개를 들자 은박지와 색종이를 잘게 자른 종이들이 마치 오랜 옛날의 연극의 끝을 장식하듯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을 펴자 손에 은박지와 붉은 색종이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 종이를 강하게 쥐었다. 이윽고 손을 폈을 때 약한 바람이 불면서 손바닥 위의 색종이를 천천히 날려보냈다.
순간 내 눈앞에서 하얀 빛이 쏟아져들어왔고, 그와 함께 수많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나를 휩쓸었다. 나는 그저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답례할 수밖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중, 일곱가지 색깔로 장식된 커튼이 천천이 옆에서부터 다가와 하얀 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빛을 가렸을 즈음, 나 자신조차도 그곳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었다.
"!!"
희한한 답답함에 더해 얼굴에 뭐가 덮고 있길래 치웠더니만 왠 수건이었다. 젖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다 울었던 모양이다. 어렸을 때 빼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게 왠 난리람...
"에우...."
옆을 보니 거대 고양이 마봉춘이 눈에 불을 켜고는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수건은 누가 갖다놨나... 설마 이 고양이녀석은 아닐테고, 왠지 모르게 피곤함이 한층 더해왔으므로 나는 만사가 귀찮아졌기 때문에 다른 수건을 잡아서 대충 눈물을 닦아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굉장한 피로 앞에 정신이 빠르게 잠식당했으므로, 나는 곧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으으으...."
명치를 누르는 듯한 통증에 깨고 보니 김 아무개가 m1902 칼집 끝으로 내 명치를 꾹꾹 눌러대면서 노려보고 있었다.
"으으... 이러지마.. 난 오늘 비번이야..."
"출근은 시켜줘야지!"
"으으... 이러지마.. 김추자씨 운전할줄 알잖아..."
김추자의 활발한 일본어가 집안을 진동시켰다.
"나는 왼쪽 핸들은 안해봐서 못해요! 그러니 자, 출근시켜줘요!"
일본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다. 그리하여 청웅 사타부언 격멸의 대업을 수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두 여자의 운전셔틀이 되는 강제 노동을 하는 신세가 되어 운전하는 도중, 김추자가 문득 말을 걸었다.
"요즘... 힘든 일 있나요?"
"으으... 어제도 출병해서 난장판 벌이고 왔는데 운전이나..."
김추자가 언성을 높였다.
"요즘! 힘든 일 있냐구요!"
김 아무개와 마봉춘은 뒤에서 장난치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친 김추자에 놀라 벙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주마등처럼 문영화와의 과거와 인연, 그리고 비극들이 스쳐지나갔다. 신기한 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토록 괴로웠건만, 무슨 기운이 통했는지 오늘 아침의 순간에는 뭔가 체념하고 포기한 듯한 후련함이 있었다. 김추자는 계속해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보고 있었다. 드물게 표정은 굳어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한마디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곁눈질 하면서 내 표정을 살피던 김추자는 내 표정이 홀가분한 듯 해지자 안심한 듯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요. 그런 정신이에요."
그러면서 작달막한 캔을 내놓았다. 중앙에 그려진 발명가 영감의 사진은 바로 숙취해소 여명 808!
"몸에 좋데요. 마셔요."
아니.. 내가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이게 왠 여명 808.... 내가 황당해서 가만히 있자
"내가 사주는 걸 못 마시겠다 그런 말이에요?!"
하면서 피꺼솟의 조짐을 보이길래 얼른 받아서 이빨로 캔뚜껑을 따고 마시자 김추자는 또 이빨로 캔 딴다고 뭐라 했지만 어쨌든 마시는 걸로 흡족해하는 듯 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띄웠으니 알기 쉬웠다.
뒤에 앉은 김 아무개는 다시 마봉춘과 노느라 정신 없었다.
이런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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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 3부 신세기 괴신사집단 전습대 53화 QUID EST VERITAS
언젠가 씁니다.
자물통이 절단기로 박살나고 오래된 콘크리트 벽돌 공장의 낡은 철문을 열어제끼면서 내가 선두로 들어가면서 외치자,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의외로 여기는 올 거라 생각을 안 한건지는 몰라도 경호대 같은 건 없다시피했고 공장도 조용했다. 겉에서 보기엔 불도 안 켜져 있는 듯 했는데 역시 이것들 창문에 시트지를 몇겹으로 발라놓은게 틀림없었다. 철제 쪽문을 열어제끼니 안은 아주 환하지 않은가? 역시 동태를 살피네 마네 하지 않고 대놓고 철문부터 버스로 들이받고 초 스피드로 전개하기 잘했다.
큰 소리를 치면서 성큼성큼 걸어가자 안쪽에서 왠 놈이 손에 정글도를 들고 튀어나왔으나, 곧 왼손에 든 콜트 네이비 리볼버의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억울하면 니들도 총 사던가. 곧 75cm의 짧은 날길이로 실내전에 친절한 해군 타치와 함께 쓰이는지도 모를 낡은 신발장들이 위치한 좁은 통로를 지나 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달려들자 넓은 공간이 튀어나왔다. 역시 자주 쓰이는 곳인지 판넬로 구성된 벽면과 바닥이나 천장 할 것 없이 깨끗했다. 사람들이 관리하는 가동중인 공장이라는 증거다.
넓다고 생각한 공간은 사실 그렇게 넓지는 않았고, 판넬로 막힌 벽체에는 문이 있었는데 창문 너머로 공기를 고압으로 불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에어 샤워가 보였다. 즉 이곳은 과거 반도체나 LCD생산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는 말이다. 피쳐폰 시절만 하더라도 공단에서 LCD같은 제품 생산이 주요한 대세였지만 스마트폰 시장이 활성화된 이후로 그런 곳들은 주로 F-PCB로 대체되거나 그냥 망하거나 했고, 또 좀비사태가 직격타로 몰아친 탓의 이곳의 수많은 공장들이 하다못해 최소한의 관리라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어버렸다. 이곳도 아마 그런 공장 중 하나였을 텐데, 설비 전환도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뭔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곧 전습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면서 내 옆을 달려 지나갔다. 대원들 몇몇은 판넬로 구성된 벽면을 따라 다른 통로로 들어갔고, 곧 욕설과 함께 누군가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련의 대원들은 빠루를 들고는 에어샤워룸의 문 손잡이를 두어번 돌려보더니 잠긴 걸 확인하고는 빠루를 문 틈새에 끼워서는 제껴 버렸다. 스텐레스 문이 금세 뜯기면서 열려버렸고 에어샤워가 작동하기도 전에 반대쪽 문을 홱 열어버렸기 때문에 대원들이 고압의 바람을 맞고 옷깃이 휘날리고 눈을 못뜬다던가 하는 꼴불견은 피할 수 있었다.
대원들이 문을 발로 차서 열고 또 어떤 놈이 재수없게 대원의 칼에 맞으면서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상황이 벌어지는 등 시끌시끌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내 생각보다도 오히려 저항이 없고 생각처럼 시끄럽지도 않았다. 이 공장은 3층짜리였고 대원들이 이미 2층까지 달려들었으므로 나는 계단을 두세걸음씩 뛰쳐올라가면서 3층으로 곧바로 향했는데, 3층 복도 끝에는 아이솔판넬로 만들어진 작은 문에 플라스틱 창이 사각형으로 나 있었고 그 창은 불투명했지만 하얗게 빛나고 있는 걸로 보아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곳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려고 뛰기 시작하자 방금 지나친 문이 홱 열리면서 오파운드 곡괭이 자루가 바닥을 강하게 강타했다. 나를 치려고 했는데 달려서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었다. 인상을 잔뜩 쓴 마른 얼굴의 양아치 같은 녀석이 나를 못 친걸 알았는지 몽둥이를 들어올리면서 달려들려고 했으나 곧 다리가 꼬이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콜트 네이비 참 좋은데.. 어떻게 탄피식으로 개조할 방도가 없네..
뒤에서 중국어, 왠지 욕설로 추정되는 큰 소리가 들리길래 뒤로 크게 빠지면서 몸통을 뒤로 크게 기울이자 거의 코끝에 닿을 정도로 몽둥이가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곡괭이 자루다. 이건 타격력은 좋지만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서 진짜로 세게 휘두르면 중간에 궤도를 바꾼다거나 하는 것 자체가 안된다. 그만큼 위력은 좋다만.. 그래서 잘못된 무기를 선택한 죄로 콜트 네이비 리볼버의 납 탄두의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덩치 큰 놈이 입 안으로 들어간 총탄에 의해 피를 울컥울컥 뿜어내면서 쓰러지자 그 뒤에는 이젠 묘사하기도 지긋지긋한, 사시미를 청테이프로 걸레자루에 고정시킨 급조 창을 들고 달려드는 놈이 보였다. 놈의 기세가 대단했으므로 조준할 시간도 없이 몸통에 대고 총격을 가했으나 엉뚱하게도 팔뚝에 맞아 왼손은 창을 놓쳤으나 오른손은 그대로 잡고 있었다. 팔뚝이 총에 맞자 다리를 오므리며 잠깐 위축되며 얼굴을 찡그렸으나 분노로 덮어버리는 듯 오른손을 길게 뻗어서 나를 찌르려고 시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명치에 맞은 총탄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달려오던 관성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시 일어서려고 시도하는 놈의 등짝을 밟고 지나가면서 머리통에 총을 한방 쏴주고서는 복도 끝의 문을 발로 뻥 까자, 물론 안들어갔기 때문에 왠 일본도가 허공을 가르며 칼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습격할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원래 상식을 거부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게 될 리가 없다. 곧 덩치는 평범했지만 운동은 좀 해본 거 같은 탄탄한 체구의 놈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내가 뒤로 물러나자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칼을 높이 쳐들고는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허망하게 막혔다. 권총과 해군 타치를 X자로 교차해서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쌍검을 쓰는 곳이라면 다들 하는데 구태여 가토리신토류의 양도(兩刀)나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천일류, 원명류를 예로 들 것도 없이 태국의 쌍검술이나 르네상스 유럽검술에서도 다 하는 방식이다. 이놈은 내가 왼손에는 권총을 들었고 오른손 한손만으로 칼을 잡았으니까 강하게 치면 오른손만으로는 칼을 받아낼 힘이 안나올테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게 세상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놈이 당황하는 듯 했으나 그때는 이미 다음 단계로 이행했기 때문에 이미 늦었다. 이 X자로 교차해서 막는 것은 받아내는 힘도 강하지만 무엇보다 상대의 칼을 묶어둔 채로 한쪽의 칼을 떼어서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 강력하다. 하나를 떼어네도 칼 하나는 놈의 칼과 접촉하고 있는 상태이니까 당장 나를 베거나 찌를 수가 없다. 권총으로 베거나 찌를 수는 없으니까 해군 타치를 떼어내어 칼날을 옆으로 눕혀 놈의 가슴을 찔렀다. 물론 장검을 떼는 순간 놈의 칼이 권총의 총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지만 방아쇠울에 걸렸으니 뭘 할 도리가 없었다. 다음 공격을 하려고 생각했겠지만 그때는 이미 눕혀진 타치의 칼날이 갈빗대 사이로 폐를 앞뒤로 관통하여 기흉의 징벌을 내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놈이 쓰러지면서 칼이 자연스럽게 빠졌고, 입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숨을 쉬는 기적에 옆으로 누워 괴로워하는 놈 뒤로... 어이구.. 낡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간지나게 앉은 저 광대뼈 툭 튀어나온 미역머리는 누구신가? 그놈은 딱히 분노도 아니고 겁먹은것도 아니고 뭔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듯 했다. 권총을 겨누며 조용히 말했다.
"머리에 바람 구멍이 날래 아니면 머리를 땅에 박을래?"
"나라면 다리부터 쏘고 봤을 텐데. 지금 그러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거든."
담담하게, 하지만 비웃음이 5%정도 함유된 말투로 말하는 놈의 표정은 여유가 사라지지 않는다. 쓰바... 그도 그럴 것이 돌파하면서 콜트 네이비의 6발을 다 써버렸거든.. 내 총이 리볼버라는 걸 본 놈의 계산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장전하기도 뭐한게 이건 화약과 탄두와 뇌관을 따로따로 결합하고 총열 밑의 밀대로 일일이 밀어넣어줘야 하는 1850년대에 출시된 그런 물건이란 말이지.
놈은 마른 얼굴에 미역머리, 그리고 로만 칼라의 검은색 옷에 단추도 검은색이고 외투도 검은색의 올 블랙 가이였다. 옆에는 노트북 가방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었다. 아마 저기에 이놈의 모든 사무 자료가 들어있을 것이고, 수사에서 저거보다 결정적인 자료는 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총알이 있었더라도 이놈이 아마 보스인 모양인데, 이놈을 죽이면 중요한 정보나 하다못해 기소거리가 사라지는 셈이니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아니 뭐 딱 봐서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짐작할 만 했다. 뭐 지금까지 보스전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결국 극한상황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은 허둥대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평소에 침착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난리가 생기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완전히 평상심 그대로이며, 냉정하다. 확실하게 보통 놈이 아니다. 놈과의 대치가 10초 정도 지났을까, 나는 씨익 웃으며 왼손에 들고 있던 콜트 네이비 리볼버를 오른쪽 허리의 홀스터로 집어넣었다. 놈은 의외라는 듯한 눈을 하더니 곧 납득하는 듯 했다. 어차피 놈이 칼을 가져서 X자로 막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만일 엉뚱한 짓을 한다면 이 타치는 한손으로 쓰기에는 위력이 대단치 않아 상대를 단번에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총알이 없는 총은 그냥 넣어두고 양손을 다 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게 합리적이다.
그리고 칼을 양손으로 잡았지만 칼끝도 놈을 겨누지 않는다. 중단 오래 취하면 힘들고 근육이 경직되어서 빠른 대응에 오히려 좋지 않다. 그 대신 오른발을 앞으로 하고 칼끝은 비스듬하게 오른쪽 땅을 향하는 이른바 <강철의 열린 문> 자세를 취했다. 열린 문이란 칼끝이 상대를 향하지 않으므로 상대가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열려있다는 것이고, 닫혀있다는 개념은 상대를 겨누어 견제하여 상대가 못 들어오니까 닫혀있다는 것이다. 열린 강철문은 일본에서 말하는 오토나시노 카마에(소리없는 자세)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무튼 손을 쉬게 해주고 언제든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한 것이다.
이놈이 어떤 서프라이즈를 숨기고 있을 지 모르므로 일단은 이렇게 대치하기로 했다. 수색이 끝나면 곧 3층으로 대원들이 올라올 것이므로 그때 처리하는 게 더 안전하다. 말도 안 하고 있는 편이 대치하는 데에는 낫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말을 자제할 수 없었다.
"문영화라는 여자를 아나?"
"문영화? 글쎄..."
놈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잠시 생각해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고개를 짧게 흔들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녀는 실종되었어. 너희들에게 납치되었지."
"우리가 했다는 증거 있나? 주변부터 더 잘 찾아봤어야지."
그러다 갑자기 짧게 한숨을 쉬더니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툭툭 치면서 고개를 삐닥하게 하고는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는 고기썰때 칼질 몇번했는지 일일이 다 기억하나? 우리가 납품하는 제품이 한두개도 아니고 어떻게 이름을 다 기억해?"
답이 없다는 투로 왼손을 이마에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꼴이 진짜 이놈은 아포칼립토 산제물로 바쳐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둣발 소리인 것으로 보아 전습대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바깥에서 자동차 클락션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회장님 의자의 팔걸이를 잡더니 의자를 나를 향해서 밀어버렸다. 이새끼 도망간다!
칼을 들어올리며 의자를 발로 차서 옆으로 넘어트리며 달려들려는 순간 놈이 뭔가 하얀 가루를 홱 뿌려버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하지만 눈에 약간 가루가 들어갔고 곧 눈에 장난 아닌 쓰라림이 느껴졌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나오면서 정신 못차리는 와중 옆에 괜찮냐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김석원이다.
다행히 소량 들어갔던 듯 몇번 닦아내자 대충 앞을 볼 수 있게는 되었는데 눈에 들어온 것은 활짝 열린 창틀을 밟고 앉아 오른손으로는 벽을 잡고 왼손으로 노트북 가방을 든 녀석의 모습이었다. 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희에게 잘못은 없다! 소방법을 탓하라구!"
이 공장은 천장이 높기 때문에 말이 3층이지 일반 아파트 건물 4~5층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뛰어내린다? 니미 놈의 창문 옆에 보이는 것은 완강기였다. 소방법 개새끼!
김석원과 내가 칼을 겨누며 창문을 향해 달려들면서 일제히 찔러버렸지만 이미 녀석은 어둠 하늘 속에서 드문드문 펼쳐진 조명들을 배경 삼아 떠 있었다. 인사하듯이 오른손을 쭉 펴고 선 채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놈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곧 놈은 공장 벽 바깥으로 안전하게 착지했고 김석원이 급히 홀스터에서 허둥지둥하며 콜트 네이비를 뽑아 몇차례 사격했지만 어둠 속에서 초고속으로 튀어나가는 두대의 오토바이에는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오토바이들은 큰 도로로 나가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급가속을 시작했다. 놓친 것이다. 허탈했다.
"그자는...."
"흑호방의 두목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말 보통 놈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제일 큰 위협이 될 것 같군요."
김석원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자는 절대 경찰에 넘기지 말고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하길래, 뭔가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말하기를
"직접 보시지요."
1층에 내려와 크린룸으로 들어가 보니 김형사와 경찰들이 심각한 얼굴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나 김석원의 반응의 이유를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까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스텐레스 프레임에 볼트로 몸통이 고정된, 사지절단된 여자 여섯명이 머리통 뚜껑이 따인 채로 뇌에 전극이 박힌 상태로 정기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묘사는 일단 자제해둔다. 그런 과학적 지옥도 속에서도 스스로 한가지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문영화의 모습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씹쌔끼들.. 형사생활 수십년만에 나를 빡치게 만드네..."
그런 김형사가 내린 명령은 아까 우리를 습격했던 그 폭도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대령하라는 것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했는데, 열받은 전습대원들과 김석원 등 소대장들이 놈들을 추적한 다음 대부분 쏴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14놈 정도가 붙들려 왔는데 이놈들은 모두 전신에 피멍이 들고 뼈가 부러지거나 턱이 이탈된 자가 7명이었으며 귀에 칼을 맞고 반쯤 잘린 자가 1명이었다는 점만 말해둔다.
사기꾼 관장이 이끄는 꼰대 관원들의 자뻑 집단인 정무림은 폭발 사고에 직빵으로 걸린 탓에 관원들의 반 정도가 죽거나 다쳤고, 주변에 도뙈기시장처럼 주차해놓았던 관원들의 차량은 파편에 본넷이 뚫리거나 앞유리가 깨졌고, 하다못해 기스라도 나지 않은 차가 없어 며칠간은 카센타가 호황을 누리는 때아닌 행운을 맞았다. 사기꾼 관장의 멱살을 잡는 가족들도 있었다곤 하나, 자기들이 좋아서 자율방범대에 가입하고 활동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고 한다.
문제의 공장은 경찰의 말에 의하면 이미 설비들을 철수시키고 이사를 사실상 끝마친 시점에서 최종적으로 철수만 앞두고 있던 순간에 우리가 기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납치되어 과학적 지옥도의 도구가 된 여자들은 아마 김형사의 감이 가리키는 바로는, 이전에 팔다리로 만든 인간문자 FUCK YOU처럼 경찰을 농락하기 위한 작은 서프라이즈로 준비해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 싸가지없는 광대뼈 미역머리 놈의 머릿속에는 아무래도 클라이브 바커가 사는 모양이다.
이 일로 가장 덕을 본 것은 다름아닌 야망의 경찰서장 제갈 진욱이었다. 그놈은 상층부에 이 잔혹무도한 인신&장기 세트매매에 경찰을 조롱하는 인간 문자/인간 토르소의 사악함을 성토하였고 덕분에 인원의 확충을 확실히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원이 하루만에 불쑥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서, 곧이어 실시된 반월공단 전 공장에 대한 일대일 수색 점검에는 사기꾼 관장의 패거리와 우리 전습대원들이 대량으로 동원되었고, 한마디로 뺑이를 쳤다.
그대신 성과가 없는 건 아니라서, 버려진 공장 건물에 살림살이를 차리고 사는 사람이라던가, 과거 항적방의 것으로 보이는 무기들이 다량 숨겨진 곳을 찾아내는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 혹시나 기대했던 청웅 사타부언의 새로운 증거나 현장은 따로 나타나진 않았다. 결국 그 공장 2개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황산테러를 당했던 할머니는 결국 실명했고, 얼굴 피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복수의 기회를 달라고 하던 그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나는 그때까지 안 죽고 살아있던 흑호방의 간부 한 놈을 제공했는데, 그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내 알 바도 아니고 알 생각도 없다.
그리고 결국 문영화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신원이나 행방도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굳이 예상해보자면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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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다가 멈춰선 나를 돌아본 문영화가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면서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으며, 피부는 고운 편이다. 뒤에서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고,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콘크리트로 대충 포장된 산책로에서 서너 걸음 앞선 채로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뒤로 콘크리트 기단부가 이어져 있었고 그 위로 나무들이 푸른 잎을 자랑하며 우거져 있다.
내가 가만히 있자 나를 향해 다시 걸어오면서 그녀가 내 팔을 잡고는 팔짱을 끼었다. 그녀의 촉감과 모습과 머릿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행복이 밀려들었다. 다시 그녀와 함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넌... 내 아내지?"
"그럼~ 맞지!"
그러면서 그녀가 팔을 뻗어 손가락을 펴 보였다. 거기에는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러면서 내 팔을 잡고는 들어 보인다. 내 손가락에도 그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파고든 햇빛이 반지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녀는 팔을 내리고 다시 함께 걸었다.
살짝 더운 바람은 초여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기는 맑았고.. 그리고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 학교 수업 종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소리였지만 내가 중학교때 들었던 그 종소리였다.
"저거 뭐야.. 까투리?"
산책로 정중앙에 서 있던 까투리 한마리를 보고는 팔짱을 풀고 달려나가는 그녀를 보았다. 블라우스에 롱스커트 차림의 그녀는 수수했지만 아름다웠다. 나는 폴라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역시 수수한 옷차림이다. 까투리가 날아가 버려서 시무룩해서 돌아온 그녀를 보듬어 주면서 다시 한참 걸었다.
그리고는 아래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돌아보았다. 옛날 차인 대우 에스페로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 에스페로가 달릴 리가 없잖아...
그걸 무시해야 했지만, 괴롭게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돌아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아도 못 본 척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차라리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 전부 한순간 긴 꿈이었을 뿐이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세상과 내 앞에 있는 그녀가 현실이기를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발 그러기를 바랬을 것이다.
"넌... 어떻게 죽은 거야?"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뭐야.. 또 뭔 소리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으로 만들어진 등산로에 줄을 지어 지나가는 개미들의 대열이 있었고, 누군가 버린 담배 꽁초와, 누렇게 변한 솔잎들과, 약간의 모래들이 드문드문 비추어지는 태양빛에 그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약간 느껴질 듯한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지자, 그 빛들도 함께 흔들렸다. 나무가지들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기 때문이리라.
"넌 옛날부터 가끔씩 이상한 말을 했어..."
말끝을 흐리며 조금씩 울적해지는 듯이 톤이 내려가는 그녀의 말이었지만.. 곧 다시 하이톤이 되면서 생기 발랄한 어조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점도 좋아."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나뭇가지들 사이에 달린 잎들이 태양빛을 가려 그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눈부셨지만 그 빛을 피하지 않았다. 피부에 느껴지는 빛의 따사로움과 함께 피부를 타고 흘러가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점점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었는지 애매해져가는 것을 느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던 몸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군벌의 지도자였다던가 허리에 칼을 차고 갱들과 싸우고 순찰을 다녔다던가... 그런 일들이 있긴 했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세상은 지금보다는 좋지는 않았었지..."
다시 그녀를 보니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살짝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5분을 있었지만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사람의 인기척도, 자동차의 엔진 소리나 그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대로... 너와 둘이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있는 것만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긴..."
가슴께에 뜨거운 감촉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는 했지만 더 이상 입을 열였다가는 모두 잃어버릴 것만 같아 감히 그 이상 뭔가 말할 수는 없었다.
얼굴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고, 곧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에 축축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괴로워..."
나즈막히 한마디 하자. 그녀도 내 셔츠를 강하게 쥐었지만 곧 손을 느슨하게 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점점 더 회색이 되어 가고 있었고 개미떼들은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푸른 잎들과 태양빛은 점점 수십년 된 사진처럼 바래가고 있었다. 하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빛의 따사로움 만큼은 여전했다. 세상은 점점 흑백이 되어가고 있었는데도.
그녀가 얼굴을 떼지 않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리고 세상은 건물과 나무와 산과 하늘이 차례로 사라졌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이윽고 땅에 이어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 곧 나의 모습도 사라졌다. 완전한 암흑이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어디에 떠 있는지도 모를 나룻배를 타고 대나무 자루에 끈을 달은 조잡한 낚싯대를 드리운 영감 한명이었다. 한참 앉아 있던 그 영감은 이윽고 침묵을 깨고 한 마디를 던졌다.
"Quid est veritas?"(진리가 무엇이냐?)
나는 라틴어는 몰랐지만 그 말은 자주 들어봤으므로 곧 대답했다.
"노인장은 로마 인도 아니면서 무슨 라틴어를 쓰려고 하십니까?"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노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
다시 침묵했다. 노인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도 모르는 긴 시간 동안 낚싯대만 드리우고 있었다.
문득 그녀를 생각해낸 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바닥이 있는지도 모를 암흑 속에서 잔잔한 물에 파문이 일어나듯 눈물이 떨어져 수면이 흔들렸다. 암흑 속에서 그 눈물과 흔들리는 수면만이 빛이 있었다.
"그런데 네가 끌어들인다. 그녀를.."
뒤를 돌아 나를 본 노인네의 눈에는 검은 구멍만 있었고, 입술 사이에 눈알이 있었다.
"너는 죄가 많다."
이상한 모습에 놀란 나를 보던 노인의 눈꺼풀이 입처럼 움직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괴물처럼 보이느냐?"
"아무도 그런 모습을 보고 아니라곤 못할 겁니다."
"그것은 너의 모습이다."
눈을 깜빡이자 노인네의 얼굴은 인자한 보통 산신령 비슷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씨익 웃더니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짓고는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다시 눈을 깜빡이자 초가집 안에서 책상을 두고 그 노인과 내가 마주앉아 있었다.
"내가 뭘로 보이느냐?"
"조선시대 마을 영감님 같습니다."
노인네가 이빨을 드러내며 깊은 주름을 보이며 웃었다.
"그건 네가 보고 싶은 모습이다."
그리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쓴웃음에 가까운 그 얼굴에는 나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해야 할 그런 표정이 있었다.
"나가서 다 이루거라."
문을 열고 나가자 풀 하나 없는 황량한, 붉은색의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평원에 바위산만이 드문드문 있는, 붉은 하늘이 펼쳐진 세상이 있었다. 태양은 아주 작았으며... 구름은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태양 저편은 붉은 색이고 내 위로는 매우 옅은 하늘색의 하늘이다. 황량한 사막 같은 땅에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저편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누군가 싾은 듯한 돌무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돌무더기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뒷짐을 지고는 발로 괜히 자갈을 툭툭 찼다. 그러기를 한참이다.
나는 전습대 제복에 해군 타치를 찬 차림이었다. 모자는 없었다. 습기 없는 황량한 화성의 사막바람이 불어 내 프록 코트 자락을 휘날렸다. 손을 들어 바람을 느껴보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모았다가 펴고는 다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개울 건너편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죽은 거냐... 아니면 살은 거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한참 쓴웃음을 짓더니 눈을 감고는 말했다.
"살아서는 이 개울을 건너올 수 없어."
"그럼, 죽은 거구나..."
다시 한참 서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내가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옯겼다. 그녀가 그것을 보고는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구두가 개울의 물에 닿자 그녀가 돌을 집어서 내 발밑으로 던졌다. 툭 소리를 내면서 내 구둣발에 맞아 튕겨나간 돌은 서너번 구르다가 멈췄다. 그녀가 뭘 말하려는 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개울가에 반쯤 담궜던 구두를 다시 떼어 땅을 밟았다. 두어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그녀가 던진 돌을 주워 오른손에 쥐었다. 돌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괴로웠다.
그녀에 대한 미련만큼 돌을 쥐고 있던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제는 체념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 옆의 돌무더기를 향해 다시 던졌다. 붉은색의 돌이 돌무더기 꼭대기 근처에 떨어졌다가 다시 굴러서 밑으로 내려갔다.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너를 신부로 맞이하겠어."
"그 말, 벌써 780번째인 건 알아?"
발랄한 어투로 말하는 그녀였지만 이미 평온한 표정 속에서 눈물이 흐른 지는 오래되었다.
"781번째는 없는 줄만 알아둬."
"그 말도... 벌써 780번째야...."
더이상 둘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을 조금이라도 열면 주저앉아서 통곡할 것만 같았다. 그저 눈을 감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하염없이 서 있는 것 이외에 뭘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두어 걸음 옯기고는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가늘게 떠는 그녀가 있었다.
다시 두어 걸음 걷고 두번째로 돌아보았을 때,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눈물을 본 듯 했다.
세번째로 돌아보았을 때에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번째로 돌아보았을 때, 개울조차도 사라져 있었고, 노인네와 초가집도 없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서 있던 곳을 향해 그저 하염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작은 태양이 점점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했고, 생각보다는 빠르게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곧 하늘에 그 수를 셀 방법조차 없을 만큼의 별들이 반짝였고, 생전 눈으로 본 적도 없던 은하수라는 것이 하늘 위로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별들과 성운과 은하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고, 곧 하늘과 땅도 어둠에 잠기듯이 천천히 사라졌다. 암흑 속에 오직 나 혼자만이 서 있었다. 땅이 어딘지도 몰랐으니 서 있는다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으니 돌아선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서서 고개를 들자 은박지와 색종이를 잘게 자른 종이들이 마치 오랜 옛날의 연극의 끝을 장식하듯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을 펴자 손에 은박지와 붉은 색종이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 종이를 강하게 쥐었다. 이윽고 손을 폈을 때 약한 바람이 불면서 손바닥 위의 색종이를 천천히 날려보냈다.
순간 내 눈앞에서 하얀 빛이 쏟아져들어왔고, 그와 함께 수많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나를 휩쓸었다. 나는 그저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답례할 수밖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중, 일곱가지 색깔로 장식된 커튼이 천천이 옆에서부터 다가와 하얀 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빛을 가렸을 즈음, 나 자신조차도 그곳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었다.
"!!"
희한한 답답함에 더해 얼굴에 뭐가 덮고 있길래 치웠더니만 왠 수건이었다. 젖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다 울었던 모양이다. 어렸을 때 빼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게 왠 난리람...
"에우...."
옆을 보니 거대 고양이 마봉춘이 눈에 불을 켜고는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수건은 누가 갖다놨나... 설마 이 고양이녀석은 아닐테고, 왠지 모르게 피곤함이 한층 더해왔으므로 나는 만사가 귀찮아졌기 때문에 다른 수건을 잡아서 대충 눈물을 닦아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굉장한 피로 앞에 정신이 빠르게 잠식당했으므로, 나는 곧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으으으...."
명치를 누르는 듯한 통증에 깨고 보니 김 아무개가 m1902 칼집 끝으로 내 명치를 꾹꾹 눌러대면서 노려보고 있었다.
"으으... 이러지마.. 난 오늘 비번이야..."
"출근은 시켜줘야지!"
"으으... 이러지마.. 김추자씨 운전할줄 알잖아..."
김추자의 활발한 일본어가 집안을 진동시켰다.
"나는 왼쪽 핸들은 안해봐서 못해요! 그러니 자, 출근시켜줘요!"
일본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다. 그리하여 청웅 사타부언 격멸의 대업을 수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두 여자의 운전셔틀이 되는 강제 노동을 하는 신세가 되어 운전하는 도중, 김추자가 문득 말을 걸었다.
"요즘... 힘든 일 있나요?"
"으으... 어제도 출병해서 난장판 벌이고 왔는데 운전이나..."
김추자가 언성을 높였다.
"요즘! 힘든 일 있냐구요!"
김 아무개와 마봉춘은 뒤에서 장난치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친 김추자에 놀라 벙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주마등처럼 문영화와의 과거와 인연, 그리고 비극들이 스쳐지나갔다. 신기한 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토록 괴로웠건만, 무슨 기운이 통했는지 오늘 아침의 순간에는 뭔가 체념하고 포기한 듯한 후련함이 있었다. 김추자는 계속해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보고 있었다. 드물게 표정은 굳어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한마디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곁눈질 하면서 내 표정을 살피던 김추자는 내 표정이 홀가분한 듯 해지자 안심한 듯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요. 그런 정신이에요."
그러면서 작달막한 캔을 내놓았다. 중앙에 그려진 발명가 영감의 사진은 바로 숙취해소 여명 808!
"몸에 좋데요. 마셔요."
아니.. 내가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이게 왠 여명 808.... 내가 황당해서 가만히 있자
"내가 사주는 걸 못 마시겠다 그런 말이에요?!"
하면서 피꺼솟의 조짐을 보이길래 얼른 받아서 이빨로 캔뚜껑을 따고 마시자 김추자는 또 이빨로 캔 딴다고 뭐라 했지만 어쨌든 마시는 걸로 흡족해하는 듯 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띄웠으니 알기 쉬웠다.
뒤에 앉은 김 아무개는 다시 마봉춘과 노느라 정신 없었다.
이런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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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 3부 신세기 괴신사집단 전습대 53화 QUID EST VERITAS
언젠가 씁니다.




덧글
간택된것은 김추자이기 때문에..?!
다음번엔 중국제 AK로 무장한 애들 데리고 다시 올거 같네요. 웬지 추자씨가 첫번째 타겟으로 당할거 같은 예감이...
저런 타입은 살려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