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순찰에서도 여지없이 시체가 나왔다. 이번에는 아마 천웅방 사람의 시체인데 머리 왼쪽이 함몰된 시체 하나와 턱이 부서져 병원으로 후송된 중상자 한명이다. 전습대원 둘이 따라가서 응급실 수속을 밟았고 곧 천웅방 조직원들이 와서 감사를 표하며 인수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원홍을 통해서 천웅방에 의사를 전달했지만 감히 전습대의 순찰 구역에서 이런 사건을 계속 벌이다니 이는 군부의 명예에 직결되는 도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문제다. 그리하여 직접 전화를 하려고 하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형 감사합니다..."
"오 너 이 역적놈 아주 전화 잘했다. 분명히 여원홍씨에게 전해 들었을텐데?"
뒤이어 이어진 왕조명의 변명은 이러했다. 일단 자신부터가 그렇게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단지 공적이 크고 대의원의 지지를 얻어내어 두목의 자리에 오른 것일 뿐이지 독재적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휘하 대의원들의 준동을 막기가 어려우며 개중에는 항적방과의 항쟁을 주도하여 입지를 강화하려는 자들의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인종차별집단인 전습대와의 관계 개선에 불만을 품은 대의원은 일단 자기를 제외한 전부인지라 자신의 입지가 매우 흔들리고 있다는 하소연도 함께다. 원래 이 왕조명이와 통화하면 교장선생 협박하듯 혼을 내 주려고 하였으나 졸지에 하소연 들어주는 구덩이 역할로 바뀌어버렸다.
결국 그런 자들을 통제할 수 없어 자기도 답답하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가던 종파분자가 문제지. 너에게 필요한 건 역시 리스펙트.. SWAG야."
"휴...."
왕조명의 한숨을 듣자 하니 한 70년전에도 비슷하게 힘들어하던 동명이인과 겹쳐보였다. 국민당의 유력 정치가였으나 친일부역배로 최후를 맞은 정치가 왕정위. 하필 그의 실명은 왕조명이었지.. 미남이고 말도 잘하며 일도 잘하고 추진력도 있었으나 결국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해 몰락한 위인이었다. 지금 왕조명도 어느 면에서는 비슷한 입장 아닌가. 하지만 일본정부는 국민당의 왕조명에게 해악만 되었지만 전습대는 천웅방의 왕조명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차라리 이렇게 찔끔찔끔 싸움을 벌이지 말고 아예 이번 기회에 니가 북벌하자고 나서지 그래?"
"예? 형 아니 군벌시대도 아닌데 무슨 북벌이에요?!"
나의 발언은 이러하다. 왕조명이 항쟁을 막으려고 하니까 자꾸 입지가 추락하고 종파분자의 준동에 밀리는 것이니 아예 항적방과의 대항쟁을 소리높여 외치고 초 강경파로 변신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항쟁을 주장하는 종파분자는 그간 해놓은 말이 있으니 왕조명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고 정쟁의 주도권이 왕조명의 손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근데 항적방이 진짜로 실력에 나서면 우리 천웅방이 이길 수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죠."
"전습대의 화약이 사놓은지 오래 됐는데..."
"예?"
"재고품은 선입선출을 해야 되겠는데..."
왕조명도 금새 눈치챈 듯 하다. 그렇다.. 천웅방은 무장으로 보나 대원들의 실력으로 보나 항적방과 대 항쟁을 벌이면 이길 수 없다. 기껏해야 걸레자루에 사시미를 청테이프로 동여맨 창 수준이 고작일 천웅방에 비해 길고 잘 만들어진 창 내지는 도검이 튀어나올 항적방, 소문으로는 권총도 있다는데 말할 필요도 없지. 그러나 전습대의 정예 병단과 160자루의 P53엔필드 라이플, 총검과 창, 군도가 유능한 참모본부의 지휘를 받는다면 항적방 같은 건 하루만에 묻어버릴 수 있다.
왕조명이 입지가 없는 것도 결국 그 혼자 홀홀단신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의원들은 자기에게만 충성하는 사병 건달들을 데리고 있지만 왕조명은 그런 게 없다. 그렇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무력 없는 조직 간부에게는 존경도 갈 수가 없다. 그런데 전습대가 그의 배후를 봐준다면? 모든 천웅방 대의원들이 힘을 합쳐도 왕조명에게는 그 10배 이상의 무력집단이 함께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이번 항쟁을 왕조명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내고, 큰 싸움이 벌어져 난리통이 벌어지면 전습대가 출병하여 폭동을 진압한다며 반항을 유도하고, 이에 항적방이 조금이라도 반항의 제스쳐를 취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일제 사격의 폭풍이 그들을 휩쓸 것이다. 그때 천웅방은 미리 슬그머니 도망가 있으면 그걸로 오케이다. 처음부터 천웅방과 공동작전을 펴면 안되는 이유는, 그들은 어디까지나 깡패들이고 우리 전습대는 치안의 첨병이니까, 깡패와 경찰이 같이 놀면 Respect가 추락한다.
"재고품을 처리해야 하잖아?"
"예...."
"본격적으로 일정이 잡히면 나에게 직접 전해. 알겠지?"
"예."
전화는 끊어졌다. 머리는 좋은 놈이니 통빡은 잘 굴리리라 믿는다.
"왕조명인 모양입니다?"
여원홍이다. 사무실이야 교실 2개를 연결한 교무실 정도의 크기라 조금만 크게 통화해도 쩌렁쩌렁 울리다시피 하므로 여원홍이나 다른 간부들도 뻔히 들을 수 있으니 여원홍이 통화내용을 대충 파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도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모양이로군요."
"그는 총명한 사내이지만 노회함이 부족합니다. 그는 거짓 애정을 부릴 줄 모르지요. 독을 쓸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특히 아낍니다. 봉행님에게 그를 소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개 조직의 수장으로써는 좀 어떨까 싶군요. 오히려 국민당의 왕조명보다 한수 아래가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듭니다."
여원홍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는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는데 그 친구는 조직생활은 물론이고 수장 경력은 더군다나 길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찌 해 나갈지를 두고 보는 것도 좋겠지요."
나 또한 수긍하는 표정을 짓고는
"일본군은 국민당의 왕조명을 평생 괴롭혔지만..."
여원홍이 찻잔을 들어 입에 댄다.
"전습대는 천웅방의 왕조명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입니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뚜껑을 덮는다. 책상 저편을 보면서 한 2초정도 생각하는 듯 했는데 얼굴빛은 수긍하는 듯 마는 듯 애매했다. 곧 여원홍이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몇달 전의 그 관장 말입니다."
"관장이요...? 아 그 사기꾼?"
"다시 돌아와서 도장을 재건하려고 한답니다."
"머라고요?"
여원홍이 꺼낸 이야기로는, 그 관장이 그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홀연히 며칠 전에 다시 나타나서는 원래 그 도장을 다시 열었으며, 곧 전습대에 복수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복수야 백천번이라도 하고 싶겠죠. 허나 그 양반 실력은 제가 경험해 봤는데 복수 운운할 레벨이 아닙니다."
"뭐 저도 그날 그 현장에서 구경하고 있었으니 설마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원한이 뼈에 사무치면 기인을 만나는 법이라 하니 어떠한 무공을 싾아 돌아왔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권총이라도 패용하고 다녀야겠습니다. ㅎㅎ..."
마침 오늘은 나도 근래 살인사건이 빈발한 초지동 빌라 구역 순찰이 예정되어 있다. 전습대 활동이 궤도에 오른 뒤로는 직접 순찰을 나가는 일은 별로 없었으나 우리 전습대 시큐리티 서비스에 가입한 상인들이 불안을 표하는 터라 초지동과 주변 지역에 대한 순찰병력을 2배로 늘렸다. 야간 내내 돌아다녀야 하므로 다음날 피로가 심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원들을 로테이션을 돌려도 사람이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간부들도 직접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오늘은 6소대장 덴슈로쿠로 김석원, 그리고 나와 차출된 전습대원들을 포함해 6명이 순찰을 돌기로 했다. 오랜만에 나가는 순찰로, 2013년 12월 말인 오늘은 날씨가 유독 추웠기 때문에 실내에서 입던 단추 다섯개의 색코트에서 단추 10개의 프록코트로 갈아입었다.
"....."
내 캐비닛 안에는 옷과 권총 이외에도 95cm의 장대한 칼날을 가진 롱소드와 86cm의 칼날을 가진 세이버가 들어있었다. 전자는 미국 알비온사의 얼(The Earl)이고, 후자는 미국 콜드스틸사의 나폴레옹 세이버이다. 여원홍에게 그 관장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기 때문에 순찰무장을 이 둘 중 하나로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도를 쓸 줄 모른다.
전습대원들에게도 교육시킨 구 일본육군 토야마학교의 검술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이 토야마학교 검술은 베기와 찌르기를 돌격하면서 수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 것에 불과했다. 전습대원들에게 가르친 커리큘럼은 이 기본 틀에 근대검술의 검리를 적용시킨 내용으로, 적은 훈련기간으로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배출하기는 했지만 일본도라는 도구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끌어낸 검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르네상스 검술을 배웠으므로 그 검리를 응용해서 싸우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일본도는 대체적으로 짧기 때문에 일단 길이와 거리의 익숙함에서부터 차이가 나며, 길이 탓에 르네상스 검술의 중심인 바인딩의 원리를 기반으로 싸워 나가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내 목숨이 위험하다면 가능하면 일본도보다는 롱소드를 가지고 나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에이..!"
불안을 떨쳐버리려는 듯 강하게 캐비닛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그 관장이 어디서 뭘 배워 왔든 설마 오늘 오겠으며, 전습대 6명에게 덤비기야 하겠는가? 더군다나 오늘 동행하는 6소대장 김석원은 음류도법의 전인, 관장이 80cm도 안되는 짧은 칼로 설쳐봐야 음류도법 앞에 오줌을 지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롱소드나 세이버는 무겁고 다리에 칼집이 쓸리는 터라 오래 걸어야 하는 순찰임무 입장에서는 귀찮다.
프록 코트의 단추를 잠그고 소드벨트를 차고 해군도를 장착한 다음 돌아서 나섰다. 오래 고민해봐야 추운 겨울날 사람만 엿먹인다는 대원들의 마음의 소리만 더 커질 것이다.
3일째, 새벽 1시.
12시 지나면 날짜가 바뀐다지만 역시 내 입장에선 내가 자고 일어나야 다음날이다. 날씨는 생각보단 덜 추워서 초지동 낡은 빌라 밀집지역인 이곳도 그럭저럭 다닐 만 했다. 새벽 1시가 되니 불이 켜진 집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사람들은 내일 아침 일찍 공장지대로 출근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아직 새벽 시간대에 여가를 즐기는 여유란 먼 나라의 사치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동행하던 김석원은 잠깐 이야기하다 다시 한참 조용했다가 다시 잠깐 이야기하기를 반복했다. 김석원의 관심사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에서 가장 흥분한 것은 내가 여원홍이 두번째 군제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였다.
"그자는 마치 자기가 제갈량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합니다. 순찰을 위해서는 지금 편제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로쿠로 또한 중령 출신 아닙니까? 확실히 우리 편제가 낫다고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우리에겐 정보와 군수, 경리를 통괄할 참모본부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작전지도역 말대로 이치부로(김진철)과 니부로(김책)는 전투부대 지휘에는 맞지 않아요. 오히려 둘의 능력을 살려 참모부 근무를 시키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자가 자금과 정보를 독점하고 권력을 늘려 종파분자적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이 로쿠로(김석원)에게는 걱정이 됩니다."
"자금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김추자는 요시노부 공의 부하이지 그 외의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을 겁니다."
김석원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원홍이 참모본부의 설치를 요구하고 있었고 참모본부를 설치하면 그에게 어느정도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원홍은 무술을 배운 사람도 아니고 휘하에 사병이라고 할 만한게 있는 것도 아니다. 왕조명과 사이가 좋았지만 왕조명 또한 여원홍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처지라서 여원홍이 천웅방의 무력을 배경에 업고 쿠데타같은 짓을 꾀한다 한들 왕조명은 병력 동원이 어려운 입장이고 그렇다고 천웅방의 다른 대의원들이 여원홍에게 협조할 리도 없었다. 이미 전습대에서 일한다는 점 때문에 여원홍은 다른 중국인들에게는 좀 경원시되고 있게 된 처지였기 때문이다. 친일부역배에게 협조할 독립운동가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여원홍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는 전습대 일에 열정을 가지고 사심 없이 임하고 있는 듯도 하니 말이다.
"카마지로(내 가명)! 지금 저거 봤습니까?"
김석원이 손으로 가리키는 저편에는 왼손에 뭔가를 들고 골목에서 나왔다가 다시 골목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왼손에 든건 딱 봐도 장검이다. 항적방 아니면 천웅방인가...
"쫓아갑시다! 너희들은 저쪽으로 돌아가, 야스스케 너는 나와 같이 간다!"
김석원이 지시를 하자 3명의 전습대원은 빌라 담을 넘기 시작했고 나와 김석원, 야스스케는 사라진 놈의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스스케는 김석원의 막내아들인 김안조(金安助)의 가명이다. 근처에서 중국어로 소리치는 기색이 나더니 곧 비명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비명소리는 2명의 것이었고 소리의 간격이 매우 짧은 걸로 보아 빠르게 두명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어설프게 거들먹거리는 깡패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역시 양방의 항쟁에 동원된 전문가임에 틀림없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다라 골목을 돌자 쓰러진 사람 둘이 보였다. 한명은 몸 좋은 걸로 보아 항적방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냥 호리호리한 몸매인 걸로 보아 천웅방인가, 아니면 그냥 둘다 불운한 희생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덩치 큰 남자 손에 들린 도끼와 호리호리한 남자 손에 들린 사시미를 보니 그런 생각은 곧 거두어졌다.
"벌써 늦었군... 그런데 이건..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두 방의 조직원 모두가 아닙니까?"
김석원이 칼을 수평으로 놓고 쉬면서 말했다. 큰 노다치인 만큼 항상 손이 자루만 쥘 수는 없고, 발도는 했지만 쉬어야 할 때에는 왼손으로 칼날을 잡고 사타구니 높이로 수평으로 들고 쉬는 버릇이 있었다. 롱소드보다 칼날이 더 무거운 일본도 계통이라 있는 버릇인가 싶다. 자주 관찰되는 이 양반의 버릇인데 뭐 비상시에 즉응성은 좋으리라 본다.
"9시방향 위!!"
야스스케의 소리에 왼쪽을 쳐다보니 담벼락 뒤에 숨어있던 놈이 담 위에 올라 점프하면서 내 머리를 노려 칼을 후려친다. 나는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판단으로 앞으로 튀어나가자 내가 있던 자리에 놈이 착지했다. 막겠다고 생각했다면 머리를 베였을 것이다. 발끝을 축으로 몸을 180도 돌려 놈을 향하면서 칼을 내 몸의 왼쪽에, 칼끝은 밑으로 향하는 <멧돼지 이빨의 자세>를 취한다. 이탈리안 롱소드 검술의 계보에서 전해지는 자세로 머리를 비우기 때문에 상대를 유도하는 기능이 있다. 곧 놈이 내 머리를 노리고 정면베기를 해 오자 나 또한 즉시 앞으로 튀어나가며 왼손으로 칼등을 받치며 놈의 팔을 밀어 올리려는 심산이었는데...
놈이 팔이 밀려 올라가는 것을 알자 오히려 자기가 먼저 팔을 들면서 옆으로 치워버린다. 놈은 칼을 수평으로 자기 왼쪽에 두었고 나는 졸지에 칼을 하늘로 올리고 몸통을 싹 비워준 처지가 되었다. 곧 놈의 수평베기가 시작되었으나 나는 칼끝을 밑으로 내림과 동시에 왼쪽 무릎을 굽히고 오른쪽 다리를 펴며 몸을 뒤로 약간 빼주면서 놈의 칼을 막는다. 놈은 수평베기가 실패한데다 내가 다시 오른발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리자 칼끝을 나에게 향하고 칼을 몸 중심선에 두며 오른발을 내밀고 나를 견제한다. 일본 검술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중단 자세이다.
놈은 분명히 검술을 제대로 배운 놈임에 틀림없었다. 단지 신체적인 반응 운운을 떠나 어떻게 싸워야 하는 가를 제대로 배운 놈인데 이놈이 취한 중단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통 초보는 팔이 경직되거나 칼끝을 너무 높이 올려서 바인딩하기 매우 쉽게 한다. 자기는 칼 뒤에 잘 숨고 상대를 잘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론 칼을 어서 바인딩해서 치워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놈은 팔에 힘을 많이 주지 않으면서도 칼끝은 배를 향하고 있다. 이러면 칼이 거의 수평이 되므로 바인딩이 어렵게 된다. 밀거나 쳐내서 치우려는 대부분의 시도가 무력화된다. 이것을 처리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지만 일본도로 하는 경우는 칼이 짧으니까 잘 될지 어떨지 모른다. 그런데 이놈 얼굴은 가리고 있다만 체격이 어디서 많이 본 듯 한데...?
"사기꾼?"
한마디 툭 던지자 놈의 눈썹이 움찔한다. 역시... 뒤이어 일본육군 1934년 교범의 요령대로 칼을 90도로 크게 뒤로 넘겨 베려는 기세를 뿜어대며 달려드는 척을 하자 놈이 중단에서 찌르기를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곧 칼을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놈의 칼날 옆면을 후려치자 손에서 확 놓쳐버린다. 이것도 요령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쳐버리면 상대 손등 쪽으로 힘이 가해지므로 놓쳐지지도 않고 잠깐 칼끝이 치우쳐져도 금방 다시 돌아오지만, 왼쪽으로 치면 손가락이 풀린다. 칼을 몸에 붙이고 중단을 취할 때에는 안정적이므로 이것도 잘 안 되는데, 찌르기 시작하면 좀 불안정해지므로 아주 잘 통한다.
놈이 칼을 놓쳤으나 왼손으로는 잡고 있어서 완전히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뒤로 빠지면서 나의 뒤이은 내려베기를 피하고는 다시 중단을 취하자 3차로 내려베기를 시도하던 나는 딱 멈춰버릴 수밖에 없었다. 썩을. 이래서 칼이 길어야 된다. 내가 롱소드 내지는 세이버였다면 저런 짧은 일본도가 중단을 취하든지 말든지 무시하고 수박을 깨버리면 그만이고, 상대도 긴 칼을 들었다면 자세를 회복하는 시간이 좀 더 걸리기 때문에 더 쉽게 이길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중단에 기세를 잃고 멈춰버린 틈을 타고 놈이 잠바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뭘 꺼내려 든다. 저거 뭐야.. 설마 수리검?
"누오옷!!"
난데없는 기합 소리에 나와 놈이 옆을 보니 김석원이 3척 1촌의 노다치를 들어올려 놈을 베려고 하는 참이다. 놈은 당황하여 급하게 도주하기 시작하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도 3척 1촌의 노다치 앞에 척추까지 두쪽날 뻔했다.
"잡아!"
놈이 도망치는 방향에 아까 돌아가라고 시킨 3명의 전습대원이 나타나고, 뒤에서 나와 김석원, 김안조가 쫓아오자 놈은 중단으로 전습대원들에게 대적하던 자세를 풀고 다시 담을 넘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좀 쫓아가니 도로가 나왔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놈의 흔적조차 없었다.
부아아앙-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빌라 주차장 쪽에서 오토바이가 튀어나와서 우리 앞을 지나 신시가지 쪽으로 도망간다. 놈을 놓친 것이다. 김석원이 숨을 고르다 못해 침을 여러번 넘기고 겨우 호흡을 진정시키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더니 그제서야 평소의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다시 미소를 띠고는 말을 건다.
"보병지도역의 검술 실력은 허명은 아니었군요. 일본도는 쓸 줄 모른다고 노래를 부르시더니 다 농담 아닙니까?"
"진짜 검술들이 다 그렇듯 하나만 제대로 배우면 나머지는 따라오는 법이죠. 하지만 역시 목숨을 맡길 물건은 아닌 듯 합니다."
나도 숨을 고르고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야 나니 겨우 진정이 된다.
"순찰하면서 만나는 자들이 죄다 일반인들이라 비상시 발도하기 편한 타치를 썼지만 앞으론 롱소드 차고 다녀야겠습니다."
"그냥 타치 쓰셔도 되겠습니다.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다 팔렸습니다. 그놈이 뭘 꺼내려고 들지만 않았더라면 정신도 못차릴 뻔했습니다. 허허..."
전습대원들의 눈빛에서도 존경심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저자도 보통이 아니군요."
"저친구 그때 그 사기꾼 관장입니다."
"예?"
다들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석원도 그렇고 여기 있는 대원들도 그렇고 다 그때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관장의 실력이야 뻔한 줄 다 아는데, 저렇게 몸놀림도 잽싸고 검술도 보통이 아닌 자가 그때 그 사기꾼 관장이라고?
"체격도 그 관장이랑 똑같습니다. 배는 좀 들어간 거 같지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사기꾼이라고 말을 하니 바로 반응을 하더군요. 작전지도역도 어제 그 친구가 돌아와서 도장을 재건하려고 움직이고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어디서 저런 검술을 배워 왔는지... 아니 그 일이 있은지 겨우 반년 좀 넘었는데 벌써 저렇게 사람이 변한답니까?"
다들 조금 긴장하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습대원들의 무력에 근접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으니 심리적으로 안심하고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정도의 사람이 단체를 일으킨다면 앞으로 전습대의 독보적인 위치는 어느 정도 위협을 받을 것이고 앞으로 전습대원들도 진지하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잡몹 때려잡던 시절이 끝난다는 것이다. 단 김석원의 표정은 제일 먼저 풀렸다. 무슨 생각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이 양반은 자기 검술로 싸워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전습대에 입대했으니 상대가 잡몹이 아니라면 실력있는 자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내 추정은 점점 옅은 미소를 띠어가는 김석원의 카이젤 수염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보병지도역께서는 어떤 검술인지 대충 짐작이 가십니까?"
아니 그런 거 가지고 어찌 알겠누.. 검술이란 게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곤 하지만 무슨 패션도 아니고 그런 개성이 칼 몇번 교환한 거 가지고 바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그냥 일본도 쓰니까 일본 검술이겠지 싶은 정도다.
"그러고보니 칼이 짧지 않았습니까? 2척 2촌 내지는 2척 3촌 정도 되어보이던데.."
김안조의 말을 들으니 눈이 대충 뜨이는 느낌이다. 큰 소리로 한숨을 푹 쉬자 김석원이 궁금해한다.
"왜 그러십니까?"
"대충 어디 검술인지 알 거 같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다음날 낮이 되어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어제 사람이 또 죽어나간 데 대해 항적방도 피꺼솟, 천웅방도 피꺼솟하여 둘다 대의원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곧 큰 충돌이 시작될 듯 하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4대조직만이 아니지 싶다. 한국인 세력도 하나 생겨날 듯 하다. 역시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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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괴신사집단 전습대 28화 전9일의 역 5일째
언젠가 씁니다.
*활약의 재패니즈 타치
저의 부심의 원천 재패니즈 타치. 오늘 활약한 물건이자 극중에서 허구헌날 차고 다니는 물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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