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제한된 시간에만 나왔다.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은 당연히 결방이고, 90년대를 생각나게 할 만큼 TV는 오전 6시에서 11시 반까지, 그리고 5시부터 9시 뉴스를 마지막으로 도합 10시간 좀 못돼는 시간만 나왔다. 하기야 90년대 초반에는 TV는 오후 6시 반부터 시작해서 12시쯤에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24시간 방송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방송이 이러니 아직 30대도 안됐는데 옛적의 향수가 괜히 밀려올라온다.
나오는 내용은 일반적인 재난방송의 형태로 각 지역을 번갈아 연결해가며 상황을 보도하고 뉴스 형태로 이런저런 소식을 보도하고 나서는 다시 정부의 대책과 진행상황을 알리며 정부에서 발표한 대국민 대처지침을 계속해서 알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연예인들 중 안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눈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행히 모두들 나와서 힘을 잃지 말라는 캠페인에 동원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 노홍철은 여전히 빅마우스가 끝내준다. 이쯤되면 분위기파악 못하는것도 상상 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유재석이 대가리를 후려칠까. 전진과 하하는 행방불명이며 나머지 멤버는 다 살아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여하튼 뉴스 중에서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것들은 몇가지 있었다.
1.정황상 북한도 동일한 재앙에 직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2.일본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모조리 억류했으나 피해가 점차 발생하고 있다는 것.
3.중국도 비슷한 상황.
4.이명박 행정부에서 백신이 개발되었음을 발표했으며 WTO는 긴급 저작권폐기조치를 발동하여 세계 각국에서 양산에 들어갔다는 것.
5.수방사 주관으로 수도 서울에 군대가 진입하여 외곽에서부터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 등이다.
지방도시들은 여전히 큰 문제없이 군경과 자경단의 활약으로 좀비의 확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다는 뉴스도 그중 하나다.
오랜만에 강원도에서 부사관으로 근무중인 임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 살았냐?"
"당연하지 최고사령관께서 그리 쉽게 돌아가실줄 알더냐?"
"야 이제 좀비들 다 뒤졌다."
"드디어 출병하는 것이냐?"
"어. 그동안 좀비한테 물려서 집단으로 당할까봐 그동안 부대 경비만 하고 있었거든. 수방사 쪽은 포위당해서 격전 좀 치룬 거 같더라고. 여하튼 우린 다 백신 맞았음ㅋㅋㅋ 좀비가 백날 물어봐야 소용없음ㅋ"
"그래서 그동안 개기다 이제서야 나서는 거구만?"
"어, 지금 창고에서 A급 대검 나오고 실탄 지급받고 장난 아니다. 영내 정글도도 나오고 있고. 강원도쪽은 별일 없으니 일단 원주쪽으로 가서 지원 들어가야 될 거 같아."
"이제 좀비들은 드디어 좇되는것이냐, 우린 때아닌 창칼 가지고 이게 왠 쌩쑈인지 모르것다."
"뭐 조직이라도 결성한거야?"
"뭐 사채업자로 추정되는 근육괴물에 의사양반도 있고..."
"이, 이보시오 의사양반, 니가 고자라니!! 안돼!!"
"니가 성불구자가된다 그말인가! 니가 고자라니!!"
그렇게 서로를 고자로 만드는 말싸움이 끝나고 나니 대치동 김씨가 아주 관심이 많은 눈치로 묻는다.
"내가 사채업자인건 어떻게 알았냐?"
"거모동에서 선이자로 목숨 어쩌구 하지 않았오?"
"...........휴......."
정체가 탄로난 게 조금 그런듯 한숨을 쉬더니 다시 묻는다.
"그래서 군대가 반격한다는 거지?"
"그런듯 싶슴다. 이제 여기서 이러고 있을 날도 얼마 안남았나 싶네요."
"군대... 군대라....."
"왜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라도?"
"아니 그냥."
하기야 꼭 석연치 않아야만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라는 법은 없다. 관심 끄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나저나 말이우."
"뭐?"
"우리도 활이나 그런 거는 있어야 할 법한데 김형의 생각은 어떠하우?"
"있으면 좋지. 며칠전 이마트 털 때도 활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더 나았겠지. 근데 쏠 줄은 알어?"
"당연히 모르죠."
"장난해?"
"석궁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흐음.... 근데 활은 어디가서 구하려고?"
"여기서 쭉 올라가서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사정(射亭)이 있지요. 한량들이 활쏘는 곳인데 기본적으론 자비구매이지만 정에 비치하고 다니는 것도 제법 있답니다. 주인들이야 어찌 되든 됐을 테고 일단 산 사람은 써야죠."
그래서 공원의 사정에 가보기로 했다. 이번 멤버는 굳이 많을 필요까진 없어 보여서 동생과 나, 김씨와 누님 정도만 액티언 스포츠로 나갔다. 동생은 다리부상도 왠만큼 회복되었고, 이번에는 좀비와의 싸움도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소규모이겠지만 그래도 현장의 분위기를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크게 달라지는 법이다. 언제까지고 썩혀 둘 순 없으니 견습이라도 일단은 해야 했다.
차를 타고 올라가니 샤니 빵공장이 있었다. 할인매장이 있길래 일단 들어가 보니 문은 잠겨 있는데 안에 빵은 많다. 어차피 물건은 많았으니 굳이 털 필요는 없어 걍 놔뒀다. 근데 대치동 김씨가 대치도의 이시즈키(자루 끝의 철제 보강물)로 유리문을 깨부시는게 아닌가.
"어차피 빵이 오래 가겠냐. 흠..... 보아하니 유통기한이 아직 크게 지나진 않았네. 이거 실어다가 그 생존자 그룹들한테 갖다주면 되겠구만."
"김형이 왠일이우?"
"이놈이.... 비록 살아도 이렇게 산다지만 그래도 사람은 서로 도와야지. 최소한의 인의도 없으면 그게 바로 지옥인거다."
"그렇다면서 딴슈퍼 털면 될걸 굳이 이마트 조폭들을 죽여요?"
"걔들은 조폭이고 새캬. 니도 앞장서서 죽이고선 이제와서 왠 성인질이야."
이시즈키로 내 머리를 가볍게 툭 친다.
"그래서 지금 실어가실 거요?"
"..........................."
김형이 잠깐 침묵한다.
"돌아올때 부실걸 그랬나...."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금방 사정에 도착하니 왠걸 과녁판 근처에서 중년 아저씨가 다급하게 활질이다. 좀비들이 뜀박질하며 달려드는데 50미터 정도에서 죄다 머리나 가슴을 맞고 쓰러지고는 있지만 점점 쓰러지는 거리가 활쏘는 아저씨와 가까워지고 있다. 볼것도 없이 김형이 액티온 스포츠 뒤에 안전 카라비너를 걸고 안전 허리띠를 단단히 조이자마자 액티온 스포츠가 활터의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대치도가 마치 예초기마냥 좀비들을 차례대로 베어낸다. 좀비는 한 15명 정도에 액티온 차징으로 죽은 놈이 한 5놈 되어 보였다.
"아저씨 우리가 처리할테니 활 쏘지 마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헤잉 스피어를 꺼내들고 누님은 나기나타를 꺼내들었지만 여느 때처럼 달려들지는 않았다. 동생놈에게 경험을 시킬 좋은 기회였다는 데에 모두의 생각이 스치고 있던 게다. 동생놈은 내리자마자 10마리에 달하는 좀비들의 숫자를 보곤 주저하기 시작했다.
"나 다구리맞고 뒤지는거 아냐?"
"조까. 배운대로만 해봐. 우리가 뒤에서 창으로 다 지원해준다."
"%^#$%#$@!!!!"
괴기한 비명을 지르며 좀비 두세놈이 마구 뛰어온다. 우리가 슬쩍 뒤로 물러서자 좀비들이 제일 가까운 동생놈을 타겟으로 달려드는데 지랄하며 달려드는 놈의 기세에 눌린 듯 움츠러들어서는 몸이 뒤로 기울어진다. 이거야 원...
"꾸에에엑!!"
누님의 나기나타가 좀비 한놈의 목에 작렬하고 헤잉 스피어가 동생 바로 앞까지 달려든 좀비의 어깨를 찔렀다. 목이나 가슴을 찌를 수 있었지만 굳이 어깨를 찌른 건 다 이유가 있다.
"지금이야! 조져!"
그제서야 동생놈이 정신을 차리고 이야야야 소리를 치며 방패로 좀비를 들이받는다. 갑작스레 어깨를 찔려 멈칫한 좀비는 동생놈의 쉴드차징에 정신을 못차리고 엎어졌다. 그러고보니 좀비가 애초에 정신이 없지, 여하튼 엎어진 좀비놈 위로 동생녀석이 나의 1917 커틀러스를 가슴에 찔러넣은 순간 나머지 한놈이 커틀러스 찌르느라 정신이 없던 동생놈에게로 달려들었다.
"$&#*@(@!!!"
꽤객거리며 달려드는 좀비놈에 동생놈은 크게 당황한듯 보였지만 몸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 급히 옆으로 빠지면서 좀비의 옆을 방패로 팡 치자 좀비가 옆으로 고꾸라진다. 달려들다 옆에서 밀리니 스텝이 꼬여 그런 모양이다. 간지나게 넘어진 좀비를 향해 커틀러스를 뽑은 동생놈이 좀비를 마구 내려친다. 한 네번쯤 내려칠때 말렸다.
"오케이, 아웃!"
그래도 잘 멈춘다. 보통 초보자는 지레 겁부터 먹고 시작하므로 상대가 쓰러지면 공포의 대상을 배제하려는 욕심 때문에 이성을 잃고 마구 쳐대는 버릇이 있는데 말하는 대로 잘 멈춘다는건 나름 싹수가 파랗다는 소리다. 곧이어 나머지 좀비들은 다함께 달려들어 모조리 처리해버렸다. 일단 처음치곤 잘 한 셈이다.
"정말 고맙네. 자네들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이 아저씨는 이 사정에 다니는 한량으로써 보통 활쏘는 한량이 대부분 그렇듯 나이는 50대에 에쿠스를 끌고 다니는 부자였다. 자기 이름도 말해주고 이런저런 개인 신상도 이야기해주었지만 박씨라는 것 이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시간에 여기 있는 이유인즉 지방에서 일 때문에 있다가 시흥시에 거주하는 가족 때문에 급히 올라왔는데 무기가 필요할 거 같아 잠깐 사정에 들렀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공원에 있던 자들이 차를 보고 쫓아오는 거에 당했다는 걸 보니 이 공원에 놀러왔다 좀비화된 사람들이 습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여하튼 그래서 활을 쏴대고 있었는데, 점점 힘에 부쳐 활도 만작(끝까지 당기는 것)이 안되는 쯤 해서 죽나 싶었는데 우리들이 도착해서 살았다는 것이었다.
"이 활들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좀 가져가도 될까요?"
"하지만 이게 내 거가 아니라 사정 재산이고 몇개는 주인도 있는 건데...."
확실히 난감할 만도 하다. 하지만 활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면서 가족도 함께 있으면 안전할테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거듭 사정을 하며 이 활들은 끝나면 어르신께 다시 돌려드리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승낙을 한다.
좀비들의 시체를 보니 촉이 그냥 원형 촉이고 그나마 박히지도 않게 만들어진 거라 박혀도 크게 박히지 않은 시체들이 대부분으로 거진 머리뼈를 근거리에서 맞아 죽던가 아니면 타격을 받고 쓰러진 정도가 대부분인지라 일단은 화살들을 들고 가서 철판을 갈아 만든 촉으로 교체할 계획을 세웠다. 뭐 촉 교체라고 해도, 살대 앞부분을 가른 다음 거기에 갈아놓은 철판을 끈으로 묶는 정도이다. 다른 멤버를 받아들이는데에 인색한 김씨도 이번엔 활을 배울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 받아들이는데에 별로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뭐 군대도 반격을 시작했다고 하고, 식량도 이마트 약탈로 어느정도 확보는 되었으니까.
여하튼 이날은 좀비사태가 벌어진지 20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3일후 이 시화공단 생활은 최악의 분수령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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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사태 체험기 14편 콤비나트그라드-1
언젠가 씁니다.




덧글
제목만 봐도 기대가 마구마구 됩니다.
2.보통 좀비물에선 판데믹이 되어서 전세계가 다같이 개막장인데 이번에는 한국만 좆된 상황이군요. 지못미...
3.이제 궁수가 추가되었으니 안심이군요. 부자라서 도움이 많이 될 듯 합니다...(응?)
ps. 활 쏘시는 분들은 한량이라 부르지 않고 활량이라 합니다. 한량이란게 좋은 뜻이 아닌지라 보통은 활량이라 부르고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대하겄습니다
어쨋건...원거리 전력 추가내요..
그대로 볼트 새총대형에 탄자를 쇠파이프 창으로 대체한거같은게 보고싶다능..(사람이 장전할수나 있을지는 의문이들지만..)
뾰족한건 갑옷을 입은 상대를 꿰뚫을때 쓰는데.. 갑옷을 입지않은 좀비라면 부채꼴형 촉이 데미지가 훨씬 많이 들어가죠..
슬링거가 필요해~(...)
일반인 상대라도 무시무시한 위력 보여주겠네요.
물론...'ㅅ' 활 오랬동안 내신 어르신들은, 틈틈히 공터에 가셔서 근거리 습사 연습하는 분들도 있기에 문제가 안되겠지만..
PS....일반&실업 양궁선수팀은 안나오나요?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