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사태가 벌어지고 7일째, 알람도 켜놓지 않았는데 뭔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누가 문을 불규칙적으로 퉁퉁 두들기는데 가족 모두들 감히 문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문구멍으로 보면 제정신같지 않은 사람이 둘이 서있다는데 어제 들려온 그 좀비 울음소리 하며 졸리다가 정신이 돌아올수록 뭔가 나쁜 예감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게 점점 확신이 되었다.
요컨데 이 천하의 개자식들. 분명히 그저께까지만 해도 어리벙벙하게 서있거나 돌아다닐 뿐이었는데 이제는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한 거다. 더군다나 사람이 있을 법한 곳을 뒤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철문이 딱 막고 있는데 괜히 그걸 쳐댈 이유가 없다. 아마 문을 열어주면 덮칠 생각이던지, 아니면 괜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15층. 엘리베이터를 탔던지 계단을 올라왔던지. 이제 높은 데 산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거다.
일단 집앞의 썩을 놈들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물리면 큰일나니까 주섬주섬 갬비슨을 입고 그 위에 겨울 잠바까지 겹쳐입으니 초가을 한낮의 미쉐린 타이어가 따로 없다. 왼손에는 60cm지름의 원형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미국 콜드스틸사에서 나온 1917 커틀러스를 들었다. 75cm정도의 길이를 가진 짧은 베기용 칼인데, 이래뵈도 한때는 미해군 제식채용되었던 물건이시다. 고작 2m좀 넘는 낮은 천장을 가진 아파트 실내에서 1m정도의 긴 칼은 원하는 대로 베기에도 애로사항이 꽃핀다. 이미 몇년전부터 집안에서 형광등을 깨먹고 천장 벽지를 가르는 사고를 수십번씩 친 몸이시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그런 코메디를 다시 연출할 생각은 없었다.
잠금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수동으로 자물쇠를 풀렀다. 좀비들은 역시 소리에 가장 크게 반응하는 듯,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그냥 어리벙벙하게 서 있다가 열쇠 푸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문에 달라붙어서는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한다. 문도 열줄 안다니 이만저만한 현행법 위반이 아니다. 이러한 중범죄를 저지른 좀비들에게 본인의 자비는 바닥이요 곧 사형이라는 즉결심판이 내려졌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을 확인한 좀비들이 곧바로 달려들려는 순간, 이미 덩치 좋은 인간이 방패를 앞세우고 들이받는 통에 문 밖으로 벌러덩 자빠진 좀비가 일어서기도 전에 한 놈은 가슴을 밟히고 목을 노린 커틀러스의 횡베기에 눈을 크게 뜨면서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축 늘어졌다. 앞의 좀비와 덩달아 넘어져 깔린 놈이 급히 일어서려고 했지만 곧 날아든 커틀러스의 칼등에 머리를 맞고 정신 못차리다가 입 안으로 쑥 들어간 커틀러스가 빠져나올 쯤에는 이미 그놈도 움직일 수 없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을 볼 때 역시 이 좀비들은 영화처럼 팔다리가 잘리면 그게 굴러오는 놈들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인간의 사고를 조종하고 기억을 활용할 줄도 아는 것 같다. 문도 스스럼없이 열고 그러는 걸 보면 말이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이놈들의 내구성은 보통 인간들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무슨 영화들마냥 목이 잘리면 촉수가 튀어나와서 나를 휘감거나 그랬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아마 대치동 김씨도 나도 그날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하는 날이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아래 13층까지 체크했지만 일단 좀비는 없었다. 집들도 확인했는데 모두 인간들이 살아 있었다. 다행히도 섣불리 문을 열어준 사람은 최소한 13층까진 없는 것 같다. 15층 앞집의 아저씨와 가족들이 나와 정말 고맙다면서 훌쩍거렸는데, 덩치 큰 아저씨가 이러니 좀 언밸런스하기도 했다. 하여튼 이 좀비 두놈이 여기까지 올라온 원인은 이 아저씨 때문이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집에서 기르는 개 때문이었다. 이 개는 우리 가족이 집에 들어갈 때마다 사생결단을 낼 것마냥 짖어대는데, 이 개가 우연히 여기로 올라온 좀비들의 기척을 느끼고 짖는 바람에 좀비들이 급하게 15층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참으로 도움이 안되는 개새끼였다.
개를 처분하라고 했는데 역시 가족처럼 지내서 그런가 감히 그러지는 못하더라. 그럼 옥상 위에다 묶어 기르라니 그렇게는 하겠단다. 옥상의 플라스틱 빗물관에 개 목줄을 묶고 대충 거처를 마련한 이후 내려왔는데, 바로 다음날 이 개를 옥상에 올려놓은 건 후회할 일이 되고 만다.
아저씨와 함께 좀비 시체를 옥상 구석에 올려놓고 현관 앞의 피도 닦아낸 다음 집으로 들어와 칼을 닦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피가 튀기도 했지만 나도 좀비화될 징조는 전혀 없다. 에이즈 균에 대해서 들은 말이 생각났는데 에이즈는 약간의 고온에도 쉽게 폐사하고 공기중에 노출되어도 금방 죽는단다. 프렌치 키스를 해도 안 걸린다고 하고, 오직 수혈이나 성교시 생긴 상처를 통해 감염된다는 듯. 좀비 사태를 일으키는 것이 직접적인 물기를 통해 전염되는 균이라면, 이놈들도 상온 공기중에서는 생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고 추정했다.
대충 칼을 닦고 나서 밖을 보니 의외로 좀비 숫자는 어제랑 큰 차이가 없었다. 어제 들은 소리는 역시 기우일 뿐인가, 가족들은 테레비와 라디오를 다 틀어놓고 전해지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나도 디시나 여러 포털을 들어가봤지만 경찰이 디시인사이드까지는 경비를 안했는지 메인에서 별로 갱신되는 건 없었다. 다만 와겔이나 스겔 밀겔내무반 같은 생활형 겔러리에선 글이 폭주중이었다. 이 상황에도 미트스핀이나 빌리동영상으로 낚시하는 놈들이 있었지만 금방 묻혔다. 대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니 일단 시골 등의 지역사회는 안정적이고, 지방 도시들은 경찰 지휘하에 민병대들이 좀비 색출에 나서고 있으며, 다만 군대의 출동은 북한 등지의 동향을 주시함과 더불어 몇몇 부대가 좀비화된 사례가 확인되었고, 이러한 상황의 해결 등을 신경쓰는 것에 더해 넷상의 뜬소문이지만 이 기회를 노려 쿠테타를 일으키려는 몇몇 간부들이 있어 기무사에서 급히 사태를 파악한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TV와 라디오에서는 국민들에게 절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는 경고와 더불어 수도방위사령부 휘하 부대들이 각 주둔지로 몰려드는 좀비들과의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지금 서울시의 50%이상이 좀비들의 완전 세력권에 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는 보도가 이어졌으며 곧이어 화면에서 관공서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시민들과 좀비들이 뒤섞여 거기에 무차별로 총격을 가하는 군경의 모습이 이어졌다.
계속해서 이명박 대통령의 긴급 성명과 국회의원들의 국가비상사태 및 긴급예산집행 통과가 가결되었다는 등의 뉴스가 이어졌지만 이 점에서 한가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서울 시민들과 좀비가 과연 어디로 향할까의 문제였다. 이미 서울시는 대부분 좀비들의 세력하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좀비들은 아까도 봤지만 전염시킬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더이상 좀비화시킬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면?
거대 좀비 구역이 된 서울시에서 주변 수도권으로 좀비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지금껏 보지 못한 초거대 좀비 인해전술이 시작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될지 안될지는 전적으로 수도 주변에 주둔한 군부대가 어떻게 나올지에 달려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이럴 때일수록 안좋은 예상 쪽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대치동 김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형, 바깥 상황 보셨오?"
"봤다. 집앞에 좀비가 알짱거리지 않더냐?"
"뭐 그러긴 했는데 앞집 개 때문이랍니다. 그렇긴 해도 개가 짖을 정도면 어느정도 올라왔다는 건데, 이래가지고서야 아파트라고 안심할 수도 없겠습니다."
"설마 개 때문일까. 이제 며칠 내로 여길 뜨긴 떠야 할 거 같다."
"뭐 형님네는 복도형 아파트라서 좀비들이 좀 많이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서도 우리는 두집이 마주보는 형태라 철문 단속만 잘하면 앞으로 일이주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냐. 이새끼들 배관을 탄다."
배관을 탄다니, 어느 도둑들이 생각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고 해도, 문만 막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배관을 탄다는 건 이제 창문 2곳 정도로도 침투할 수 있다는 소리. 더군다나 현관문은 철문이지만 창문은 유리창이다. 잠궈놓는다고 해서 못 들어올 리가 없었다. 밤에도 안심할 수 없다는 소리다.
"어제 두놈이나 우리집에 들어오려고 했다. 거기에 15층도 당했어. 벌써 1층집 두곳인가가 털린거 같다. 이새끼들이 겁도 없고 뵈는 것도 없이 산 사람만 찾아다니니까 배관 타다 두세놈 떨어져도 개의치 않고 계속 타려고 한다. 자꾸 타는데 한두놈 성공하지 말란 법도 없지. 그래서 당한거 같다. 나야 가족이 마누라 하나뿐이니 얼마든지 출발할 수 있다. 너도 더 늦기 전에 출발할 수 있도록 해라."
"아무래도 그래야 될 거 같습니다. 일단 형님이랑 저랑 합류부터 해야 될 거 같은데, 형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편이 나을거 같습니다. 제가 일단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 일단 무기들은 다 가지고 갈거다. 차는 비상계단 출구에 이미 대놨으니 갖다 실으면 되고, 일단 내가 아파트 출구에서 나와서 빙 돌아가지고서는 너네 아파트 앞으로 돌아가마. 바로 가면 좀비들 끌고 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다행히도 여기서 보니까 안산천 주변 도로에는 좀비가 별로 없네. 그쪽으로 길게 돌아서 들어갈테니 근처의 좀비들이나 좀 치워 놔."
다행히도 내 아파트 입구 주변에는 좀비가 별로 없다. 대부분 도로변으로 몰려나간 탓이기도 하지만, 이쪽 아파트 주민들은 옆 아파트와는 달리 속단하지 않고 집을 잘 지킨 덕분이었다. 곧바로 갬비슨에 창을 들고 내려가 좀비 몇마리를 즉결심판에 처하자 집앞이 깔끔해졌다. 옆을 보자 거리에 몰린 200~300명 정도의 좀비가 보여서 시껍했지만 내가 특별히 주의를 끌지 않는 이상은 떼로 습격해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아파트 현관 안쪽에 숨어서 기다리고 한 5분정도 지나자 액티언 스포츠 한대가 이쪽을 향해 왔다.
".........."
이런 상황에선 가급적 소음을 안 내는 것이 좋다. 사람을 찾아다니기까지 하기 시작한 놈들인지라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반응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옆자리에서 여자 하나가 내렸는데 대치동 김형의 아내였다. 왠지 옛날에는 우락부락 마쵸맨이 옆에 가녀린 여자를 끌어안고 가오를 잡는 그런 짜세가 유행했던 거 같은데, 지금 딱 그게 실사판으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애딸린 어미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아직 안죽었다를 외치는 세상에 하늘거리는 긴 치마는 뭔가 희소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다음으로 대치동 김형이 무기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 빨리 반입할 수 있는 도검류부터 내리기 시작했는데, 죄다 일본도 종류다. 함께 내리면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갖다놓으면 김형 아내가 실어놓는 식이었다. 나기나타도 한 2자루 정도 있더라. 일단 실을 수 있는 건 실어놓고 엘리베이터로 올려 보냈는데 대치도는 그냥 적당한데 놓기로 했다. 여기 엘리베이터에는 2.8m집어넣는 것도 겨우겨우 가능했기 때문이었는데,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김형의 상징 3미터짜리 대치도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옆 승용차 천장을 후려치고 말았다.
"삐비비비비비--!!!"
니기미 조또
자동차 도난경보음이 울리자 거리의 좀비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더니 사람 둘을 발견하곤 시위대 이동하듯 갑자기 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레프트 포 데드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지만 현실에서 당해보라. 눈앞이 캄캄했다. 여기서 죽는건가.
"아 니미 씨팔....!"
외마디 쌍욕과 함께 대치동 김형이 그 상징 대치도의 칼집을 벗겨 던지고 있었다. 생각외로 담은 안 넘어오고 보도블럭 따라 달려오고 있는 좀비들을 향해 일단 창부터 던졌다. 한 놈이 맞고 쓰러지는게 보였다. 왜 창을 안 쓰느냐면 패거리가 죽든살든 몰려오는 상황에서 내가 창으로 한놈 죽여봐야 옆의 몇놈이 달려들어와서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딱 맞는 방법이 있었다. 등짝의 방패를 빼서 손에 끼우고 허리춤에 들고나왔던 커틀러스를 뽑아 자세를 낮추었다. 물론 소수 대 다수를 상대하는 원칙은 둘 다 알고 있었다. 좀비에게 옆치기나 뒤치기를 당하지 않도록 아파트 메인 현관 안쪽으로 이미 들어가 있었다.
10미터 앞까지 다가온 좀비들을 보면서 공포 속의 개드립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Boomer!!!!"
레포데에서 부머에게 오바이트를 맞으면 좀비들이 떼로 몰려온다. 그때 기분은 무섭지 않았다. 게임이니까.
이제 인생 한판을 건 빅 게임이 시작될 판이다. 부머 한마디를 외치자 신기하게도 당혹감과 공포가 사라지고 등짝이 싸해지면서 면상에서는 썩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4미터 앞까지 다가온 좀비들을 보면서 또다시 개드립의 욕구가 터져나왔다.
"Hey SON OF BITCH COME ON LET'S Go!! ANG?!!?!"
"야 니가 저새끼들보다 더 또라이 같다!"
"또라이가 짱먹는 세상입니다!?!"
말마따나 이런 상황에선 또라이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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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오마이숄더 언젠가 씁니다.





덧글
젭라 5화도 자비롭게 조만간 올려주심 감솨..굽신굽신
너무너무 재미있네요^^
앙겟썸, 앙?
좀비물인데 왜이렇게 웃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레포데엔 칼&방패가 없잖아.
우린 안될거야 아마
뿜었습니다...
아, 여담이지만 에이즈바이러스는 공기중에 노출됐다고 바로 죽지않습니다. 공기중에 노출된 혈액에서도 3~4일은 버틴다는군요.